(히브리서 13:1-6) 돈을 사랑치 말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5. 6. 04:00 Writer : 김홍덕


간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것이 아닌 것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삶는 것을 말한다. 이는 육신으로 자기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의 관계를 간음이라고 하듯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라는 당연한 자신의 짝이 아닌 것과 관계를 형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간음이 존재 목적에 관한 것이라면 돈은 수단에 관한 것이다. 수단은 목적에 부속된 것이다. 목적이 본질이고 수단은 목적을 이루는 것을 위한 필요일 뿐이다. 그런데 목적의 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분히 나타난 것을 본질로 보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한 행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돈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는 뜻이다. 즉 도구인 돈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돈을 도구로 삼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특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된 분에게 일은 그 육신으로 사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일은 돈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면 그 육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것이 먹고 입는 문제다. 이것은 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에 대하여 제법 많은 말씀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 단연 으뜸은 아무래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우선 이 말씀과 히브리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과의 연관성을 보자.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목적보다 수단이 본질이 되면 안 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도 당연히 이것과 궤를 같이한다.


예수님께서 먹는 것과 입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라는 신앙 근간의 문제다.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사람과 세상을 지으셨으니 그들이 하나님이 계획한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것이 필요한지 다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만든 물건도 마찬가지다. 자동차를 만든 사람이 자동차에 무엇이 필요한지 모를 리 없고, 자동차를 사서 운행하겠다는 목적을 가진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을 안다면, 아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만 믿어도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므로 돈을 사랑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무능이고, 알면서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간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정한 목적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말씀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은 간음도, 돈을 사랑하는 것도 자기 것이 아닌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런 관점에서 간음하지 말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들어오면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또한 학대 받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대로 회복되기를 권면하고, 회복되었을 때 어떤 삶의 모습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회복된 모습은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육신을 자기 옳다는 주장 앞에 내어 주니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는 모습에서 우리 육신이 사람들의 주장 앞에 수고를 내어 주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는 만드신 목적이다.


이 창조의 목적대로 회복된 모습, 예수님의 십자가의 본질이 자기 본성이 된 모습을 생각해보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대가 옳다고 하는 것, 상대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것, 귀찮고 모두가 몸을 쓰기 싫어하는 것에 자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삶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 더욱이 그 모습이 신념이나 노력이나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인하여 그렇게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삶 어느 부분이 성경을 어길 수 있을까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예로 보자. 이웃을 위하여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는 이 보다 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까? 그것도 본성으로 인한 것이라면, 본성이 그를 그렇게 살게 만들기에 진동치 않고 늘 그렇게 살면서도 그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는데 성경의 어떤 부분을 어길 수 있을까?


그렇게 예수님의 희생을 담대히 믿고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성경의 많은 권면들, 거듭나지 않은 관점으로 보면 “~~을 하라”로 보이는 그 말씀들은 육신이 자라면서 하나씩 역량이 늘어가듯 자기 삶에서 성경의 권면들이 더 깊고 넓고 다양하게 행하게 된다. 그것을 성경은 장성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분량으로 자라는 것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자라고 장성해지고 항상 하는 것이기에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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