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17-40) 믿음으로 – 4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4. 18. 04:00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답게 다시 한 번 소개된다. 특히 아들 이삭을 바친 일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것에 순종했다. 사람들은 이것에 대하여 자의적인 해석을 많이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니 정말로 번제로 드리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이 생각했다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이삭을 바치면 다른 아들을 주시든지 아니면 분명히 다른 대책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생각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간과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을 하나님이 모를 리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브라함은 분명히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했다.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브라함도 아버지였으므로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은 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것이 본질이다.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이삭이 죽지 않을 것을 믿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삭이나 자신이나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 하나의 일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주요 내 인생의 주관자라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전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확인한 믿음은 그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조성하시고 나를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이 만들고 경영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이 선하고 의로운 것이라 믿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지금 히브리서가 말씀하는 믿음도 그리고 인용한 아브라함의 믿음도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믿음 그것이 있으면 믿음의 모양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이 생각하는 육신에게 좋은 일을 해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아브라함이 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렸는지, 하나님은 왜 그것을 주문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신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없다.


히브리서가 설명하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로 표현된 모든 믿음의 모습들이 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주관자라는 것을 믿는 보이지 않는 믿음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그 모양도 다양하다. 사람들이 바라고 소망하는 육신의 평안과 성공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유익하게 믿음을 해석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가 말하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이라는 신의 존재 정체성을 믿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신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가 사람과 세상을 존재하게 했다는 것, 선진들은 그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나타난 본질은 바로 그 믿음이다.


이 믿음을 히브리서는 약속을 받지 못한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17절에서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믿음이라고 했다. 아브라함만 보면 약속을 받은 사람이었다가 아닌 사람이기도 했다가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선진들이 보여준 믿음의 모양들, 히브리서가 믿음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는 좋은 믿음들은 모두 그 약속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뜻이 약속이고 사람은 그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증거를 받은 믿음이고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약속의 본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더 좋은 것을 예비하였다고 언급하고 12장에서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하신 것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믿음 장은 앞서 단번에 제사를 드린 예수님의 온전함을 설명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이 모든 믿음은 결국 예수님께서 온전한 제물이 되어 우리를 구속했으니 우리가 이제 죄가 없는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 자리로 가자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준 모습들이 바로 예수님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순종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와 뜻은 이것 뿐이다. 여기서 모든 것이 비롯된다. 믿음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쉬운 것 같지만 이 믿음을 오늘날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믿는다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 걱정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서야 한다며 기도하는지 모른다. 그런 모습은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만들어줄 도깨비 방망이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런 마음은 필시 예수님이 자신을 구속했다고 믿는다고 하지만 스스로를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를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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