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2. 2. 18:36 Writer : 김홍덕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나는 수요일 예배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것도 항상 장로님들보다 앞, 예배실 가장 앞쪽에. 어느 수요일 조금 늦게 도착해서 기도하는 중에 들어가서 앉았다. 그리고 눈감고 고개 숙이고 있는데, 앞줄에 앉은 친구가 뒤로 돌아보면서 조용히 “야, 20원 있으면 줘봐라.”하니 우리 줄에 앉은 친구들이 “야, 예배 시작했는데 어디에 전화 걸려고?(당시 공중전화가 20원)”라고 하니 그 친구가 말하길, “그게 아니라, 이거 헌신예배야?” 뒷줄에 앉은 우리는 웃음을 참고 있는데, 그 중 한명이, “야 임마! 하나님이 걸뱅이(거지의 경상도 사투리)가?” 말해서 끝난 일이 있었다.


헌신예배하면 가장 먼저 떠오는 것이 이 에피소드다. 그러니까 헌신예배라면 헌금하는 예배, 헌신예배를 드리는 부서의 재정 충당을 위한 헌신예배라는 정도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만 이야기하는 것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헌신이라는 의미가 정말로 온전히 교회에 용해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헌신, 몸을 드린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헌신은 몸으로 하나님께 수고의 열매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청소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에 몸의 수고를 드리는 것이나, 또 몸을 수고하여 얻은 소득을 헌금으로 드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더 고상하게 삶을 하나님께 드리자고 하는 것도 있고, ‘주님을 위하여 죽자!’라는 각오로 선교나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해 가는 것도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헌신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몸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몸에서 나오는 공로나 몸으로 얻은 소유나 목숨으로 바꾸어 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헌신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하신 말씀이야 말로 제대로 된 헌신의 정의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사람들은 몸을 제사로 드리라고 하니 몸이 할 수 있는 어떤 행동이나, 몸의 수고나 목숨을 그리라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몸을 주신 것, 아니 사람에게 육신을 주신 것, 사람을 몸으로 만드신 이유가 있기에 그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려서 예배가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몸 자체에 목적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제사로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말씀에 ‘영적 예배’라는 것과 ‘산(Live) 제사’는 같은 의미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을 성전이라 하고, 성전이란 예배를 드리는 곳이라는 점이 그렇다. 그러니까 사람 안에 하나님이 거하심으로 사람이 성전이 되는 것, 그것이 영적 예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산 제사라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헌신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수고한 땀을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몸이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는 형식과 도구와 육신이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자세히 본다 해도 미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자동차를 태워주는 것과 자동차를 주는 것의 차이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몸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을 드리는 것을 헌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 자동차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로 태워드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동차를, 몸을 달라고 하시는데 말이다.


이렇게 헌신에 대하여 오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헌신이라는 것 자체만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잘못 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헌신이라는 것이 몸의 열매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두루미와 여우의 식사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람의 몸의 열매가 아니다.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몸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의 몸을 쓰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바로 사람의 몸 가진 삶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제사가 아니라 순종을 원한다.”고 하신 것이다.


사람은 빈 그릇이다. 그 빈 자리를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자기 자신을 채우려 한다. 입으로 음식을 먹는 것 뿐 아니라, 눈으로 읽고 보아서 자기 안에 채우려 하고, 또 귀로 들어서 채우려 하고, 또 느낌과 기억을 채우려 한다. 그것은 그 빈자리가 채워질 것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있을 것이 제 자리에 채워지지 않으면 그것이 채워질 때까지 계속 채워야 한다. 그것이 안식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있을 것이 채워지면 더 이상 수고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안식하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좋았다는 것은 사람의 빈자리에 하나님의 형상과 숨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온전히 있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안식하셔도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창조가 끝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의 몸과 삶이 하나님이 거하시게, 하나님이 채워졌을 때 그 모습이 바로 온전한 성전이 된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산 제사요, 영적 예배며 그것이 온전한 헌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헌신예배라며 한복 입고 특송하고, 또 헌금하고,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자고 각오를 다지는 것이 헌신이 아니라, 이 육신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온전한 성전으로 여기고 하나님이 거하시게 순종하는 것이 바로 헌신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몸에 거하시는 것을 순종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육신의 삶을 부정한 것으로, 연약하고 감추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몸을 절제하고, 훈련하고, 노력한다. 몸이 연약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그 수고를 헌신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헌신은 하나님께 몸의 수고나 공로나 재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드리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려면 이 몸을 가진 인생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삶이 하나님께 드릴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데서야 어떻게 드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헌신하는 삶이 되려면 이 육신을 가진 삶이 아담과 같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순종하고 보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자기 삶의 본질을 하나님으로, 빈 그릇과 같은 인생을 하나님을 모심으로 몸이 성전이 되고, 삶이 산 제사와 영적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헌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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