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하나인 삶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12. 15:38 Writer : 김홍덕

모든 것의 순서와 인간 존재의 목적



많은 신앙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규칙이나 규범처럼 지킴으로 그 공로를 하나님이 평가하셔서 천국에도 가고, 또 천국에 가서 부자로 살 것인지 아닌지도 결정이 나며,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내일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언젠가 필자의 모친이 나에 대한 꿈을 꾸었는지 전화로 ‘네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복권을 산 적이 있었다. 결국 그 복권은 당첨되지 않았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나에게 좋은 일이라는 일확천금이라 생각했구나!’하며 돌아본 적이 있었다. 나의 그런 오류정도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면 살 동안 그런 좋은 일이 일어나고, 죽어서 천국에 가며, 천국에서의 상급도 그 공로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은 그것과는 방향이 반대이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의가 자신에게 생명이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된 것이고, 하나님의 의가 삶의 본성이 된 사람이 그리스도이니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 의에 이르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기에 성경대로 살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고, 모든 신앙인들이 닮기를 원하는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그 육신으로 성경에 기록된 삶을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앙인들이 이 순서를 모른다. 모르기도 하고, 설사 그렇게 의가 있으면 삶은 성경대로 살게 된다고 해도 믿지를 않는다. 그것은 아주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이라는 것이 늘 의문스럽고 무엇보다 힘든 일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되어야 할 일을 신념을 가지고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 되었으니 어찌 힘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경우, 어떤 상황, 어떤 말씀과 사람의 일에 있어서도 성경은 분명한 순서가 있다. 항상 하나님이 먼저 시작인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보다 먼저 계셨으며,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먼저 사랑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성경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사람이 성경을 문자로 읽고서 그것을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어떤 신앙생활도 헛것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더하여 진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성경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그렇게 뇌까리고 설교하고 공부하면 그 순서를 망각하거나, 성경을 지켜 행함으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사고방식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또한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닮고자 하는 예수님의 모든 삶이 말씀에서 나오는 것, 비롯된 것이라는 의미인데도 왜 먼저 말씀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살다가 버리고 갈 이 육신, 그리고 백년도 살지 못하고, 또 살 동안 단 한 번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이 세상의 일을 하나님께서 돌봐 주시기를 그렇게도 바라는 것인지 그 또한 정말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은 존재의 이유가 먼저 있고, 그 목적에 맞게 창조되고 만들어 지는 것이다. 사라마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이 존재한다면 분명히 존재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를 채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찾았다면 살아가는 모양이나, 성별이나, 학력이나, 국적이나, 빈부의 차이나, 학력의 차이와 같은 그 어떤 사람의 차이와 무관하게 사람이기만 하면 수행할 수 있는 목적이어야 사람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부자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부자의 존재 목적일수는 있지만 사람의 존재 목적이 아니고, 올림픽 금메달은 운동선수의 존재 이유일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의 존재 목적은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너무나 많은 삶이 있었음에도 통일된 것이 존재의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삶에 의문으로 남은 것은 언어가 혼돈케 된 바벨의 일과 같은 것이다. 많은 이들이 사람이라는 것이 아닌 사람이 가진 삶의 어떠함을 가지고 삶의 목적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 복음이 비밀일지 모른다. 사람들의 눈이 멀고 소경이라고 하시는 것은 너무나 뻔한 것, 너무 가까이, 아니 자기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 목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은 자신의 존재 안에 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무화과 나뭇잎, 즉 공로를 본질로 아는 율법과 같이 사람의 본질이 아닌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할 세상의 것을 본질로 알고 그 본질이 자신을 위대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정작 자신의 원래 모습이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시고 만드신 후에 그렇게도 좋아했던 모습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라.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감추고 싶은 모습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높이 달렸는데,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시지 않는가? 그러니까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이유는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부끄러워했던 원래 연약한 사람의 모습을 인정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머리로도 손과 발로 이루는 모든 행동으로도 또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는 옷과 같은 사회적 신분 어느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의 모습이 바로 내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채워지는 빈 그릇이 되는 것이다. 즉 그제야 존재의 목적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인생이 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행동으로 뭐든지 된다면 또한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또 자신의 신분이 자신의 모든 부끄러움을 감출 뿐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살게 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님을 가시관을 쓰심으로, 또 못 박히심으로, 또 발가벗겨짐으로 인간이 자기 생각과 행동과 신분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즉 자신의 생각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 아님을 아는 사람, 손과 발로 대변되는 모든 행동이 자기의 뜻이 아니라 지으신 이의 뜻을 표현해 내는 것임을 아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라는 것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다. 즉 자기 존재의 목적이 그것임을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 곧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 그리고 존재의 이유와 목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생으로 생각이 미치고 삶이 미칠 수 있는 모든 영역에 있어 하나님의 의가 먼저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존재 목적이자 이유인 것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으로 보임으로 깨달은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제 아무리 대단한 종교적 업적이 있어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일 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즉 하나님과 하나인 삶,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과는 반대에 있는 삶일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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