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하나인 삶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14. 15:35 Writer : 김홍덕

십자가의 의가 표현되는 삶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심령 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것이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아니 이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이고, 하나님의 법이 표현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 사람이 삶의 행동 양식을 잘 다스리면 영혼이 천국에 살 수 있는 영혼이 된다고 여기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방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온전한 신앙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이 그 삶을 주관하는 사람의 삶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이다. 반대로 마음에는 항상 갈등이 있는데 그것을 극기 훈련 하듯이 이겨내려 통성기도하고 행동을 경건하게 하려고 수련하듯, 금욕하듯 애쓰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은 아니다. 그런 것을 예수님은 ‘노릇하는 것’ 즉 흉내 내는 것이라고 하셨고, 또 외식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신앙의 훈련이라는 것도 그렇다. 사람의 행동을 바꾸어 영혼이 천국에 가는 영혼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훈련, 영성의 훈련은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표현되는 방법에 대한 훈련이다. 즉 생명이 표현되는 것에 있어 더 온전하게 표현되도록 하는 훈련이 영성 훈련이지, 사람의 행동 관습을 훈련으로 바꾸면 그 영혼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건 가능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런 방법으로 사람이 경건케 된다고 하면 누구도 성공할 수 없다. 사람은 단 하나의 규율도 평생 한 순간 예외 없이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생명의 본성이 가진 호흡은 어떤 순간도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없다. 훈련이란 그렇게 생명의 본성에서 비롯된 호흡을 온전케 하는 것을 훈련이라고 하지, 호흡이 없는 존재에게 호흡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숨을 쉬게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적인 삶은 그 사람 안에 그 삶을 살게 하는 이유, 아니 본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거짓이 아니다. 속에 그 본성이 없는데 그런 삶을 사는 것은 그 결과가 아무리 훌륭하고 대단해도 결국은 소리 나는 꽹과리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겉과 속이 다른 거짓이라고 하시고, 외식과 ‘주여, 주여!’ 부르는 자들이라고 여기실 뿐이다.


그 생명,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같은 삶,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이신 십자가의 삶이다. 예수님께서 사신 모습, 하신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말씀을 행동으로 지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보니, 그 모습이 자기 모습이고, 그런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깨달음이 자기 안에 성령의 감동으로 씨가 심기듯 잉태되듯 자기 생명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감동은 세상의 시험이나 돈 문제나 결혼과 같은 것이 잘 될 것을 예수 이름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 존재의 목적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이신 것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마치 사서 고생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서울역에서 예수 믿으라고 고함치면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욕하는 것을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섬기는 것이지 그렇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삶이란, 예수 믿으라고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 믿는 사람이 볼 때 ‘너를 보니 나도 그 예수 믿고 싶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삶을 사는 것이다.


십자가나 신앙은 권력이 아니다. 즉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보여주는 것이다.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강권하라고 하신 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그것을 하고 싶게 만드는 것 이상의 강권함이 없기 때문이지, 싫다는데도 교회에 데려다 놓으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신앙도 훈계하듯 가르치듯 또 심판하듯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어떤 삶을 보고 스스로 참회하게 하고,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신앙이다. 교육의 본질 역시 이끌어 내는 것이지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교육학의 기본 원론이다.


특히나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압박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간절함으로 사람에게 권하는 것 같지만 사람은 자기 마음에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에는 “새벽에 큰 소리로 이웃을 축복하면 그는 저주로 들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는 것은 기존의 교회라 할지라도 신앙에 대하여 ‘have to’, ‘must’라며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어떤 삶을 볼 때 그 마음에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감동이 있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삶이다. 그 감동이 성령의 감동이고,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섬기러 왔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은 남보다 아래에 서고, 남이 감동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 삶을 살게 하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 그렇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삶은 기도도 다르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무엇인가? 육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늘 안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을 받기 위함과, 그런 보장을 늘 받을 수 있는 신앙을 가지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한마디로 ‘예수 믿으니 남보다 나은 삶’을 살기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은 ‘남을 위하여 이 육신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진정한 기도인 것이다.


기도가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는 섬기러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시니,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남보다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섬기는 삶이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진정한 기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육신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고기 덩어리가 아니라 그런데 쓰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오늘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지면 자신의 삶이나 신앙이 유익해지는지, 아니면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신 목적을 깨닫고 그것이 자기 삶의 존재 이유와 목적임을 알게 하는 성령의 감동을 일으키는 일에 자신이 소모되는 것인지를 가늠하면 된다. 그렇게 보면 십자가의 삶이 무엇인지, 자신이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는지 구분하는 것은 너무 간단한 것이다.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나의 정체성이 저것임을 성령의 감동을 깨달아서 십자가로 인한 생명이 자기 안에 잉태되고 거듭남으로 그 생명이 자기 삶을 주관하게 되면, 그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사람의 모습이 사람인 자신의 존재 목적이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이 자기 삶을 주관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볼 때 그가 십자가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사람의 존재 목적이 자기 삶의 내용이 된 것과 같이 보는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즉 섬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가 표현되는 것이다. 그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다. 그것이 사람의 존재 이유이고 목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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