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11. 08:05 Writer : 김홍덕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의미가 있어진다는 것



성경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찌로다(창 2:24)

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어떻게 보면 둘이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한 성경의 처음 말씀일지도 모른다. 이 말씀에서 보는 것과 같이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같은 개체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녀가 결혼하여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을 두 사람이 같은 기능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듯,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을 두고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바보 같은 생각인데 우습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가 되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남녀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결혼을 가지고 생각하면 언뜻 쉽게 <하나가 된다는 것 =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어려워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은 머릿속에서 생각으로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하여 이해한 것에 불과하다. 이 의미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면 그렇다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남자와 여자라는 주제를 이야기 했다. 그때,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한 예표요, 그런 법을 가지신 하나님의 법이 사람의 삶으로 나타난 것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는 것을 이야기 했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 역시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 같은 하나님의 법에서 비롯된 말씀인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후손을 얻는 이 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와 법이 사람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으로 아이를 얻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신바 될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 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라고 한 답의 질문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것이었다. 즉 베드로에게 <“너와 나는 어떤 관계이냐?”>, <“너에게 나는 어떤 의미이냐?”>라는 물음인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베드로가 <예수님은 주(主)님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답변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이다. 반면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는 <“그가 누군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했다. 예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 저렇게 매 맞고 심문 받고 있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도망갔던 것이다.


이처럼 사람과 하나님, 또한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수님인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관계인지 그것이 정립되는 것이 바로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듯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과 의미를 가진 주(主)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과 같은 육신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서 자신에게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주신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의미가 있는 관계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또 예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형식에게 온전한 내용이 결합하는 것, 곧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의미와 목적이 사람에게 존재의 이유와 의미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인 것이다.



온전한 내용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사람은 하나님께 의미가 없는 존재이다. 그것이 바로 죄인이고, 의미가 없다는 것은 곧 죽은 것과 같은 것이다. 유리로 된 망치는 못을 박고자 하는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죄인이고, 또한 의미 없는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못을 박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많은 의미를 가진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것도 이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믿음이 아닌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께 뭔가를 바쳐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하여 잘못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나를 아프리카로 보내주시면 내가 선교사로서 평생을 바치겠습니다!’와 같이 어떤 조건을 사람이 제시하는 것과 같은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이 자신의 존재목적이 되면 아프리카에 살든 한국에 살든 아무 문제없이 하나님을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이 사람은 어디에서만 나의 뜻을 나타낼 수 있다.’라고 지으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게 하실 때 그가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아들의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다.


즉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 의미가 있어야지, 사람이 어디에 있을 때만, 어떤 능력이나 사회적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나님께 의미가 있어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어떤 것을 이루어주시면 하나님을 위하여 살겠다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은 하나님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육신의 삶이라는 이 형식이 어떻게 되어야 하나님께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형식으로 내용을 바꾸어내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먹고 나니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사람이라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그 모습 그대로가 원래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인 모습이었는데,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어떤 조건을 달았더니 죄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담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넣으셔서 생령이 된 모습,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 모습인 것을 버린 것이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부인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여기는 오류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즉 신앙이라는 것이 인간이 가지니 연약한 모습을 이겨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버리고 싶은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온전한 내용, 즉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과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 그 모습 그대로에 순종하는 것이 먼저인 것이다. 그런 순종, 그런 수동적인 본연의 믿음이 없으면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주술사나 도깨비 방망이 이상의 의미는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기 모습을 부인하면서, 그것을 부인하기 위하여 가진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달라고 떼쓰는 것을 믿음이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온전한 의가 자신의 존재 이유와 의미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온전한 의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 육신으로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니, 그 삶을 추구하는 것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주시고, 반대로 그 일에 방해가 되는 불행한 것들은 막아주시는 신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동적인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먼저 사랑하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롯의 두 딸이 아버지의 씨를 훔치듯 아들을 얻는 것과 같을 뿐 전혀 하나님의 온전한 의가 자기 삶의 의미인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람에게 온전한 하나님의 의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된 것이다.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이미지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 특히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쉬운 말로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무슨 권력으로 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신앙이 있다는 이유로 신앙이 없는 이들을 그렇게 하대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닐 것 같지만, 자기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 자체가 그렇다. 그것은 진정한 오만이다. 십자가의 도가 아닌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그렇게 도도하고 오만한 자세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의를 전하기 위하여 전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진 세상의 법으로 자신을 심판할 때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 교회에 가자고 하는데 놀러 가는 것을 보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있기까지 종이 된 모습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의고, 육신을 가진 이유이다. 육신은 그런데 쓰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또한 예수님과 같이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사람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예수 잘 믿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자신의 육신을 수고 중에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수고의 최고봉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임을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다. 육신을 그렇게 쓰라고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육신을 가진 삶에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온전하게 의미가 있어지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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