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는 동안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었다.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 산에서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율법이 선포되고 있는데 산 아래에선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끈 모세는 어찌 됐는지 모르겠으니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신>을 만들고자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잘 생각하지 못했지만, 재밌는 게 있다. 바로 금송아지를 만든 금의 출처다. 사람들은 그저 금으로 만들었다고만 생각하지만, 금송아지를 만든 금은 귀걸이라고 특정하고 있다. 아론이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가져오라고 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출 32:2)

 

또 하나의 질문은 '왜 송아지인가?'. 기왕에 우상을 만들려면 더 강하고 의미 있는 짐승도 있을 것이고, 더구나 애굽에서 인도해 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신을 구하는 상황이라면 송아지가 아니라 독수리나 길을 찾거나 인도하는 동물을 형상화할 수도 있을 텐데, 오히려 노동의 상징인 소를 형상화했다는 건 생각의 여지가 있다.

 

또한 성경에서 귀는 들음의 상징이다. 이건 굳이 성경이 아니어도 이견이 없는 상징이다. 들음은 믿음의 시작이고, 귀걸이는 귀를 가치 있게 만든다. 따라서 금귀걸이는 무엇을 귀하게 듣는가를 설명한다. 금귀걸이로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노동, 곧 육신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한다는 말씀을 금 같은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금귀걸이로 송아지를 만들었다는 건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걸 귀하게 여기겠다는 것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을 두고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단지 그러면 안 되는 경계의 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오늘날 기독교인 대부분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하고 있다. 모두 행동으로 성경을 지켜내야 한다는 말씀에 귀를 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올바른 길이며 복을 받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 생각이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이 사건의 목적이다. <우리를 위해, 우리의 신>을 만들자는 게 목적이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나의 유익을 얻겠다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 신앙인들이 성경을 지켜서 육신의 복을 얻겠다는 것과 같다. 성경대로 살아야 육신이 평안하고 복을 누리며, 반대로 성경대로 살지 않는다면 육신이 불행한 일을 당한다는 생각에 이를 회피하려고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우리'를 위한 신앙생활인 증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를 위한 우리의 신>으로 금송아지를 만든 목적과 완전히 같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육신의 복을 구하고, 육신의 재앙을 피하려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육신을 위한 신앙은 모두 우상 숭배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육신의 평안과 번영을 위해 행위를 거룩하게 하고, 행동으로 성경을 지킨 다음 그 공로를 하나님께 제시하고 반대급부로 자신을 위한 것들을 얻으려 한다. 그래서 송아지처럼 노동하고, 수고하고, 노력하면 복을 준다는 말씀을 듣고서 귀하게 여기고 그대로 행하려 수고한다. 금귀걸이로 금송아지를 만든다는 건 사람의 이런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엄히 벌하셨다. 언제나 그랬다.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마음과 그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로 육신의 평안과 번영을 얻으려는 사람의 마음을 아주 싫어하셨다. 이런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가 너무 싫어서 "누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실 정도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예수님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님께 제사의 행위와 율법을 지키는 공로를 드리고, 육신의 평안을 얻으려는 걸 <장사하는 것>이라고 일갈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처럼, 육신의 복락을 위해 소와 양과 비둘기를 드리는 건 하나님과 거래하고 장사하려는 시도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사실 이건 장사와 거래가 맞다. 이게 장사로 보이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모두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있다. 더 나아가 그렇게 하는 게 진정한 신앙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금같이 귀하게 여기며 자기 귀를 내어 주고, 그 외침대로 살려고 송아지처럼 노력한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자기 생각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우상 숭배고, 하나님과 장사하려는 시도이며, 존재의 하나님을 행위와 공로를 귀하게 여기는 하찮은 신으로 대하는 모욕이다.

 

사람이 육신의 평안을 위해 노력으로 성경을 지키라는 말을 귀하게 여기고, 그 말대로 노력하는 건 심각한 우상 숭배인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걸 금처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은 반면교사를 위해서 기록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듯 오늘도 금송아지는 곳곳에서 만들고 숭배하고 있다. 금같이 귀한 대접을 받는 육신의 수고에 하나님이 감동해서 복락을 주신다는 다양한 신앙 대부분이 이것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육신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복락을 귀하게 여긴다. 이것만 보고 좇아가니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못 본다. 더욱이 지금은 달력으로 예수님 오신 이후니 뭘 해도 다 복음일 것이라 착각한다.

 

우리는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약 성경의 말씀도 <해야 한다>가 되는 순간 율법이 되고, 행위로 의로워지는 시도가 된다는 걸 간과하면 안 된다. 이 둘을 보지 못하면 육신의 복락을 주신다는 말씀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금송아지를 섬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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