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7-3) 여종에 관한 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4. 2. 6. 21:39 Writer : 김홍덕

앞서 설명한 남자 종이 사람이 가진 생각, 특히 무엇을 의로 여기는지에 관한 생각이라면, 여자 종은 사람이 생각하는 의로움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이 형식은 성별로 여자를 한정하는 게 아니라 자기 육신이다.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육신이 바로 하나님 앞에 여자다. 생각을 표현할 형식인 육신이 하나님의 생각을 표현하면 그게 여종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앞에 신부인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 여자 종과 같다.

 

여종에 관한 계명은 다분히 혼인을 전제로 한 말씀으로 보인다. '상관한다'라는 표현이 그렇다. 여종의 목적은 전적으로 후사를 잇는 데 있다. 그리고 여종은 남자 종과 달리 안식년에 속량되지 않는다. 이는 기준이 남자 종에게 있기 때문이다. 형식은 내용에서 비롯된다. 사람이 가진 삶과 행동 등 육신으로 표현하는 모든 형식은 그 사람이 생각하는 의로움의 표현이다.

 

여종이 상전이나 남자 종에 종속된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성경은 남존여비처럼 보이겠지만, 보이는 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 속에 있는 의가 표현된 것이고, 그 의가 본질임을 아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의와 내용이 남자를, 그리고 그 의와 생각을 표현하는 육신을 여자로 표현하는 것임을 안다. 남자와 여자에 관한 관점을 잘 살핀다면 의와 생각이 하나님의 의와 같으면 그 육신의 삶은 자연스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안목을 알 수 있다.

 

여종이 상전에게 벗어나는 건 이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여자가 종이 되는 시작과 원인에 연결된 표현이다. 그리고 이렇게 여종이 해방될 수 있는 이유가 세 가지 있는데, 이는 모두 혼인의 의미가 상실되거나, 형식이 없는 내용으로서의 상전의 태도다. 특이한 점은 속량한다고 해도 다른 나라로 팔거나 넘길 수는 없다고 했다. 하나님의 계명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법이라는 걸 분명히 하신 말씀이다.

 

서로 기뻐하지 않는 내용과 형식의 결합은 속이는 것

 

상전이 여종을 상관히지 않거나 기뻐하지 않으면 속신케 하라고 하셨다. 이유는 여종을 상관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다는 건 속이는 것이라는 게 이유다. 내용이 형식을 기쁘게 여기지 않고 상관하지 않는다는 건 겉과 속이 다른 상태다. 상관한다는 건 혼인의 개념으로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관하지 않는다는 건 여종으로 대변되는 삶의 형식으로 자기 의를 표현하지 않겠다는 것이므로, 여자가 종이 되는 원인자가 소멸된 것이다. 당연히 여종이 속량되는 게 합당하다.

 

이는 사람이란 형식을 가진 존재는 자기를 기뻐하지 않는 상전과 함께 하지 않아도 됨을 뜻한다. 어떤 신앙이 나에게 열심히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해도, 그 안에 기쁨이 없다면, 신앙하는 대상이 나를 기뻐하지 않는다면 함께 할 이유가 없다. 그런 상태인데 계속 함께 하겠다고 자기 상전으로 섬기는 건 속이는 것이다.

 

기쁨이 없는 신앙을 이어가는 건 속이는 것

 

상전이 여종을 아들에게 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이므로 아들도 기본적으로 아버지와 의가 같다. 그 아들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은 결국 아버지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이다. 당연히 딸, 아버지의 의가 형식으로 표현된 딸과 같이 대함이 합당하다. 그런데 딸과 같이 대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종이 된 이유가 없어진 것이므로 속량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이를 거절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안에 있는 의가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 표현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면, 그 표현을 공유하는 관계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의와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여종, 곧 의가 표현된 아들의 의를 표현하는 여자를 딸과 같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상호 상관이 없다.

 

아무리 간절하게 하나님을 믿노라 해도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지 못하는 육신의 삶은 하나님과 무관한 삶

 

여종이 속량되는 마지막 조건은 상전이 다른 여자에게 장가가더라도 여종의 의복과 음식을 제공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속량된다. 여기서 우리는 여자가 종이 되는 목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전은 다른 여자에게 장가간다는 건, 상전의 의를 다른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걸 기어이 일부다처제로 본다면 그건 성경의 행간을 보지 않으려고 작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대상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신부가 된다는 걸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의 의는 너무나 많은 형식으로 표현된다. 하나님 성품의 무궁한 다양성이다.

 

여기서 음식과 의복을 끊지 말라는 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를 표현할 형식으로 창조한 사람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걸 아신다고 하셨다. 목적이 정해지면 형식의 필요는 주인이 다 공급한다. 이동을 위해 자동차를 사면 기름은 주인이 넣는다. 상전이 여종에게 음식과 의복을 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하나님은 이 계명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필요를 늘 공급하신다. 이는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하고 모든 게 일치하는 진정한 내용이자 상전이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삶을 주신 목적이 너무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사람을 향한 목적이 분명하시므로, 그 목적을 이루는 의지가 확고한 하나님이시다. 당연히 그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육신의 모든 필요는 항상 부족함 없이 공급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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