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의 시작은 <빛>이다. 빛이 무엇인가? 시간인가? 모든 입자의 근본인가? 사실 물리적으로 빛이 무엇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빛 또한 그런 물리적인 빛이 아니다. 이 빛은 어떻게 보면 인식이다. 그리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캄캄한 방에 들어가면 어떤 것도 다스릴 수 없다. 그 안에서는 어떤 세계도 열리지 않는다. 공부의 세계도 놀이의 세계도 열릴 수 없다.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빛이 있으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알 수 있다. 그런 방에 빛이 비취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빛이 비취면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렇게 인식이 된다는 것은 그 존재의 목적을 따라 사용할 수 있게 되고, 그러한 사용은 주인에게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캄캄한 방안에 선풍기가 있다고 치자. 어두울 때는 선풍기에 부딪히게 되고, 방의 주인은 그 선풍기를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빛이 비취게 되면 주인은 선풍기와 마찰도 없고, 그 선풍기를 용도에 맞게 사용하여 바람을 일으키게 될 것이고, 그때 선풍기는 주인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선풍기의 존재목적, 주인이 그것을 만들거나 구매한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인생이 무엇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흑암 중에 살다가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게 하는 것을 만날 때에 빛을 만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 빛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창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있어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바쁜 듯 하나 공허하고 그 분주함은 그저 혼돈이며, 때로 인생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역시 혼란스럽기만 한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기 전, 곧 천지가 창조되기 전이고, 빛이 없는 세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이 없는 인생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은 바로 “빛이 있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사건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셨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히는 것과 같이 인생을 밝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이 바로 천지창조의 시작인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세계가 한 사람에게서 열리는 것이다. 바로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이다



<출처 : kjv1611.egloos.com>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빛이 되시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예수님은 물리적인 광원(光源)은 아니시다. 이는 물리적인 빛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살다가 정말 힘들 때 “희망의 빛"을 이야기 하는데 그 빛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희망과 의미를 밝히는 것, 그것을 빛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분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분이 되시는 것은 예수님의 삶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빛이 되고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은 일면 맞는 말이지만 다분히 교리화 되어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교리는 함축된 결론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은 오늘 나와 상관이 있을 때까지는 그냥 함축된 문장으로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은 진리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빛이 되시는 것이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차비나 밥값 대신 내어주듯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까지도 맞을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지신 죄가 어떤 죄인가 하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인 것이다.


단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행동으로 범하는 죄에 대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으신 분이 아니다. 행동이 죄가 되는 것은 시대적인 문화와 정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인도 전쟁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고, 나라마다 간음에 대한 법도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물론 행동으로 지은 죄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유동적인 것이라는 이유로 예수님께서 그 죄를 대신 지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도 행동으로 지은 죄로 인하여 죄인이 되어 끌려가신 분이시니 예수님께서 만약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대신 벌을 받으신 것이라면 그 유효성이 빵점인 것이다.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종교적인 규례를 지키는 행동이 너무 부실하고 그들을 화나게 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내 행동으로 인한 죄에 대하여 대신 벌을 받았다고 달라질게 없다. 나와 똑 같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나와 똑 같은 그 모습이 바로 나를 구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행동으로는 종교적인 규례와 로마가 원하는 법을 다 지킬 수 없으신 육신을 가지셨다는 것 그것이 나를 해방하는 것이다. 이는 육신으로 늘 범죄하고 부도덕한 육신을 가진 존재였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었듯 나 또한 이 부정한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인생의 빛이 되시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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