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라는 것은 모든 인생이 추구하는 정체성이다. 각종 액션 영화에 나오는 모든 영웅들이 각양 세계에서 추구하고 있는 사람이 도달하고 싶은 정체성을 그려낸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마음 안에는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는 꿈 같은 사람의 모습이 있다. 그 정체가 바로 그리스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정체성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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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영웅들이 있다.

자기가 되고 싶은 정체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사람이 꿈꾸는 정체성의 대명사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사람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다르다.

우리가 위에 있는 영웅이 될 수는 없지만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은 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보여주신 것, 그것이 바로 <빛>이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고대했던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메시야(히브리어)가 바로 그리스도(헬라어)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이 그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도달하고 싶은 인간의 모습에 이르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에 있고, 빛이 없는 어두움에 있는 것이다. 자기가 도달하고 싶은 인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마음 안에 그토록 사모하고 이르고 싶은 어떤 정체성을 사모한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행동이 잘못되어서였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안식일을 어겼기 때문인 것이다. 왕이라고 하면서 세금을 안내고 다니고 성전 기물을 파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전혀 하나님의 아들다운을 보이지 못하고 왕을 구해줄 병사하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것은 분명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웅이나 메시야의 모습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든 영웅들은 하나같이 행동에 대하여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위대해지는 것이 아닌가?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의 상도 그러했다. 그런데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율법을 어기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아들이라 하셨고,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도 또 많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리스도라고 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행동으로 육신을 한계를 이겨내면서 하루하루 위대해지는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의 분명한 한계 안에서 있어서, 배고프면 안식일이고 뭐고 간에 먹을 것은 먹어야 하는 존재이고, 십자가에 끌어다 못 박으면 그냥 힘 없이 박힐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으로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려 하는 모든 인생들이 실패하여 위대함을 달성하여야 상을 받는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되는 그런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 연약한 육신 가운에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의 빛이 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행동을 짓는 죄에 대하여 대신 벌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빛인 것이다. 연약한 육신으로 세상이 요구하는 위대함에 대하여 늘 패배하여 죄인이 되는 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 그런 모습을 하나님께서 아들 삼으신다는 것, 그것이 바로 연약함 안에 있어서 위대해지지 못해서 신음하는 인생들이 그 예수님을 볼 때 자신의 모습이 그와 같다는 것을 알고 고백할 그 때 빛이 있으라 하심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태초가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빛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창조라는 것, 그 안에서 시작이라는 것은 그런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계획하신 하나님의 세계가 그 사람 안에 열리는 태초가 있는 것이고, 인생 안에서 혼돈이 걷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만나는 것이 된다는 말씀이 바로 이 창세기 1장의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위대함에 도전하다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나의 모습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 고백이 될 때, 우리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이는 선언이다. 정의를 내린 것이다. ‘빛이 될 것이다’가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고백할 때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 또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상이 열리게 하는 태초를 선물하고 그 인생에게 <빛이 있으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지창조 첫째 날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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