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의 둘째 날에는 물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위의 물이 있고, 아래에 물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창조과학회에서는 옛날에는 지구의 대기권 위에 물층이 별도로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그런 것을 말하고자 하는 말씀이 아니다.


사람들도 물을 나눈다. 사람들이 마시는 물을 상수(上水)라고 하고, 버리는 물을 하수(下水)라고 한다. 이는 사람이 먹어도 되는 물과 그렇지 않은 물로 나누어서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정글의 짐승들이나 미개한 시절의 인간들도 물을 이렇게 구분하지는 않았다. 상수나 하수나 구분 없이 식수원이기도 했고 하수도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을 나누어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다는 것은, 사람이 먹어야 하는 물과 사람이 먹으면 안 되는 물로 구분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물을 나누신 과정은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이다. 앞의 첫째 날에서 이 천지창조의 과정은 혼돈하고 공허한 땅과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혼돈하는 땅과 같은 인생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마셔야 할 물과 그렇지 않은 물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둘째 날의 창조과정이다.


물은 사람의 갈증을 해소하는 절대적인 요소이다. 생물학적으로 사람 몸의 70%가 물이라고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물은 사람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사람의 몸은 물이 없으면 갈증이 생기고 마실 물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아의 정체성에 대하여 평생 목마름이 있다. 즉,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것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고 하신 것과 일맥상통한다. 사람이 그 정체성의 혼돈과 공허로 인한 갈증을 채우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마셔야 할 물이 있고, 마시면 안 되는 물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창조의 둘째 날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는 수가성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절)이라고 하시고 또 7장에서는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38절)라고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생수라고 말씀 하셨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은 누구에게 물을 나눠주신 적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고, 또 자신을 믿는 자는 속에서 생수가 넘쳐나리라 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물을 마시지 않고 살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는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즉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끝없는 정체성의 갈증을 해소하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하여 세상에서 오는 물을 하염없이 마신다. 철학과 이방신과 과학과 같은 것을 끊임없이 마시지만 그런 것은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무리 마셔도 늘 목이 마르다.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무리 돈을 모아도 끝이 없고, 명예를 좇는 사람도 학문을 좇는 사람도 다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해도 또 목마른 것이다. 그렇게 사람을 끊임없이 목마르게 하는 모든 것은 다 위대함을 좇는 것이다. 돈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돈으로 위대해지려는 것이고, 학문을 좇는 사람은 학문으로 위대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위대함은 사람이 그런 것의 아름다움을 보고 흠모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아내로 삼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난 사람들을 네피림이라고 했다. 이는 ‘장대한 자’, ‘위대한 자’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할 사람이 세상의 돈과 명예와 같은 것을 취하여 위대해졌다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신 것이다. 노아의 홍수가 날 때 성경은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창 7:11)라고 했다. 즉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섞여버린 것이다. 그것이 홍수다.


홍수가 나면 아무리 물이 많아도 마실 물이 없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이론이 있어도 그것이 세상의 것으로 인한 위대함과 아름다움이라면 먹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상수도와 하수도가 합해지면 상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수가 된다. 그래서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합해지면 다 땅의 물이 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좋은 것으로 변질되면 못 먹는 물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사람의 딸을 취한 네피림으로 홍수가 나는 것도 그런 것이다.


이렇듯 사람이 세상의 것을 좇아서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 하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마실 수 있는 궁창 위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표준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표준과 다른 것이나 이 표준을 다른 것과 혼합한 모든 것은 다 궁창 아래 있는 물이요, 마시고 마셔도 목마른 물이요, 노아 홍수 때 범람하여 마실 수 없는 물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둘째 날에 물을 나누신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사람이 마셔야 할 물이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정체성의 갈증에 대하여 마실 물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바로 거룩함이다. 이 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지창조 이전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한 것 같은 삶에 있다가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사람의 형상으로 가는 과정에는 먼저 빛이 있어야 하고 다음에는 빛으로 밝음으로 내 정체성의 갈증을 풀어주는 물이 무엇인지를 구분하여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수를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지창조 둘째 날의 의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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