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세기 1장 1절은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성경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왜냐하면 시간의 개념과 공간의 개념이 객관화된 문화혁명 이후의 이원론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사고 안에서 볼 때, <태초>와 <천지>는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시간과 형이하학적 공간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시간에는 두 가지의 시간개념이 있다.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라고 하는 객관적인 시간 기준이 있고, 또 하나는 카이로스(Kairos)라는 주관적인 기준이 있다. 크로노스는 달력과 같이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이고 공통적이며 객관적인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개인별로 배고픈 시각이 다르듯이 아주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절대적인 관점에서의 시간이다.


또한 천지로 대변되는 세계 역시 두 가지의 개념이 있다. 하나는 지구, 또한 물리적인 공간으로 우리가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된 세계가 있고, 또 하나는 과학의 세계, 신앙 세계와 같은 어떤 관념과 철학에 관한 범주를 세계라고 한다.


이렇듯 각각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 시간과 공간에 있어 어느 것이 본질인가 할 때, 시간은 카이로스가, 세계는 관념의 세계가 본질이고 내용이고, 크로노스와 물리적 세계는 카이로스와 관념적 세계의 표현양식인 형식인 것이다. 사람이 먼저 ‘배고픈 때’라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기 때문에 12시에 점심 먹자는 시간을 정한 것이고, 생물학적, 물리적 법칙이 표현되어 세상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기준으로 보면 크로노스적인 개념 아래에서는 모든 것을 어떤 기준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점심시간을 정해 놓으면, 그 시간이 아닌 시간대에 점심을 먹게 되면 ‘왜 점심시간이 아닌데 밥을 먹느냐?’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즉 점심시간과 아닌 시간이 구분된다. 하지만 카이로스를 기준으로 한다면 자신이 배 고플 때가 점심시간인 것이다. 회사와 같은 조직체에서는 크로노스가 가족과 같은 공동체에서는 카이로스가 적용되는 것도 차이점이다.


세계라는 공간 혹은 영역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거룩하고 회사는 거룩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물리적인 공간 즉 본질이 아닌 형식에 치중된 생각이다. 사람 자체가 거룩하면 교회에 있으나 회사에 있으나 거룩한 것이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축복도 이러한 맥락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만지는 것이 다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세상 역시 어느 건물에 들어가도 물리법칙은 동일하다.


이렇듯 시간에 대해서 크로노스적이고, 공간에 대하여 형이하학적 관념을 가진 것을 이분법적 사고라고 한다. 즉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면 맞고, 다른 시간에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나, 예배당은 거룩하고 회사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 다 이런 가치관 아래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이분법적인 시간과 공간개념 아래에서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아직 사람이 창조되지도 않았는데 누가 성경을 기록했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루가 24시간인가 하는 것하며, 아담과 하와는 아들만 낳았는데, 가인이 얻은 아내는 어디서 온 것인가 하는 등의 객관적인 관념 안에서 창세기를 본다면 이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인들은 이분법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동전은 앞뒤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동전의 가치로 보는 일원론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성경을 기록했는데, 이것을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해석이 난해해지는 것이다. 아니 엉뚱한 해석이 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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