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사람을 만드시다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1. 10. 07:17 Writer : 김홍덕

생물학적으로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두고 '무엇에 대하여 어둡고 맹인이다', 또는 '아직 태초가 열리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은 금방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일수도 있다. 하지만, 군대에 가 보지 않은 사람은 군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군대가 어떤 곳인지 알 수 없듯이, 알고 공존한다고 다 자기의 세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로 시작하는 성경은,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은 존재로 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육신의 눈으로 이 창세기를 읽게 하신 것이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육신으로 살아 있어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셔서 그런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모른다. 사람들은 하나님이라는 이름도 알고, 또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하나님이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아는 것은 슈퍼맨을 아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렇게 아는 하나님은 본 적도 없고, 접해 보지도 않은 가상의 존재와 같을 뿐이다.


창세기 4장에는 아담의 셋째 아들 <셋>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 재미 있는 말씀이 하나 있다. 창세기 4장 26절에 <"그때에 비로서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하는 말씀이다. 아니, 아담 때 부터 계속 하나님과 사람들이 말도 했고, 심지어 동생을 죽인 가인도 하나님과 대화 했는데, 셋의 때가 되어서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이는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하나님으로 인식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 부분은 다음에 다룰 수 있으면 좋겠다. 아주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 그러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셋의 때가 되었을 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태초가 있었다는 표현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모른다는 것인가? 그것이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생각하기 위해서 예수님 당시를 생각해 보자. 그 당시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성전도 있고, 예배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도 있었고, 선지자 제사장 서기관 등등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것이 다 있었는데,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유대인들이 아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오실 당시 모든 유대인들과 세상 사람들은 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태초가 열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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