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나오는 금송아지나 사람들이 만들어서 절을 하는 각종 조각물이나 상징물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것들도 우상이지만 그것은 나타난 것이고, 우상의 진정한 본질은 사람들의 마음에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 불상이나 금송아지이므로 우상의 본질은 사람 안에 우상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을 이끌 신이 필요하다는 마음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라고 하신 것은 형상으로 만든 조형물과 같은 우상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형상화하는 것,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안에서 어떤 의를 가지고 있어서 그 의를 상징할 것을 정하거나 만들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 마음에 농사가 잘 되어야 복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농경사회의 신들은 많은 경우 당시 농사에 절대적인 요소였던 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생각이 우상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 안에 ‘인생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라는 의가 있으며 그것을 나타낸 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실 때, 시작하신 말씀은 <너를 위하여> 이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자기가 바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의 것을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떤 것으로 표현될 의를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으로 표현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의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형상으로 표현될 의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의를 표현할 존재로서 형상을 가진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형상으로 표현할 의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형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형상은 의가 표현된 것입니다. 이동이라는 의(도)가 자동차로 표현되었고, 소통이라는 의(도)가 전화기로 나타난 것이 그것입니다.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그 형상을 표현할 존재로서 만들어진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람은 형상으로 표현해야할 의를 가진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지어진 형상이 있는 존재인데, 그 존재가 자신을 위하여 다시 형상을 가진 우상을 만드는 것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인공지능이나 컴퓨터가 사람을 대신하는 것에 대한 우려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이 만든 것에 자기 삶이 잠식당하는 것을 염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것을 염려하는가 하면 이는 컴퓨터나 인공지능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되면 어쩌나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정체성이 의를 나타 내여야 하는 존재인지, 의가 나타난 존재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인생들이 스스로 빠진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의를 나타낼 존재가 아니라, 의가 나타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스스로를 위하여 무엇을 할 이유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는 먹고 사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먹고 사는 육신의 일에 있어 언제나 자신을 위하여 수고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정체성 자체는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위하여 뭔가를 하고 싶어도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정체성은 예외 없이 만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자기를 설명할 의와 뜻, 곧 우상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 없는데 그것을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자기 존재 정체성을 벗어난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존재의 의미와 정의를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없는 것을 우상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이 만든 우상이라는 것이 우습게도 생물학적으로도 사람보다 열등한 동물들을 형상화하는 우스운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우상을 만드는 것은 자신들 만의 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드신 이가 주시지도 않은 것이 안에 있어서 그것을 형상으로 표현했다면 어쨌든 자기 안에 형상으로 우상으로 표현할 의가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무엇이 되었든 자신을 위하여 섬기는 것을 정했다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존재는 이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존재로 만드신 형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누구라도 싫어할 일입니다. 나의 의를 표현하라고 만든 존재가 준적도 없는 자신의 의를 위하여 다시 뭔가를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그 만든 것이라는 것이 내가 만든 것을 모방한 것이라면 기가 찰 노릇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포도원을 맡기고 갔는데 자기들 것을 삼으려고 주인이 포도원을 맡긴 목적대로 소산을 얻고자 하니 자기들이 그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종을 죽이고 아들을 죽였다는 것도 바로 이 상황과 같고, 니느웨로 가라니 다시스로 간 요나도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 할 존재인데 자신의 의를 표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를 위하여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는 뜻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죄의 근원입니다. 사람의 자리를 떠난 것이지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라고 지었는데 가서는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고 자기 마음 안에 있는 것을 형상으로 만들고 그것을 섬기는 것이니 자기 자리를 제대로 벗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드는 존재가 아닙니다. 즉 자기 의를 나타낼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형상입니다. 이미 형상화 된 존재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만 잘 표현하면 됩니다. 그것은 마다하고 자기가 하나님인양 자신을 위하여 즉 자기가 옳다는 것이 선함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는 모든 짓은 다 하나님 앞에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마음에 돈이 최고다 하고 돈을 좇으면 돈이 그 사람의 우상이고, 권력이 최고라고 생각해서 권력을 추구하고 섬기면 그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그 돈과 권력이라는 것을 섬긴다는 것은 그것이 옳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옳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하여 그것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우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2계명을 지키는 것은 손으로 우상을 조각하거나 어떤 형상 앞에서 절을 하지 않는 것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2계명을 제대로 지키려면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형상으로 자기 의를 표현할 존재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형상과 삶이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지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사람이나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2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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