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을 보는 관점과 하나님 여호와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십계명 Date : 2016. 5. 16. 21:08 Writer : 김홍덕

십계명을 보는 관점

앞으로 함께 생각해보는 십계명은 이렇게 세상의 가치관에서 그 안목이 바뀐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보면 좋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대상이 바로 세상적인 안목이 지배하는 세계를 벗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하심을 구원이라 하듯이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을 자신의 의로 삼고 살아가는 세계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법에 이끌리는 세계로 들어온 것이 구원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천지창조다. 자기의 존재목적을 잃고 무심히 눈뜨면 일하고 그러다 먹고 쉬고 자고서 또 다시 그렇게 사는 삶 속에서 그 반복되게 요구하는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에 이르지 못하여 좌절한 인생 속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고 살던 암흑 같은 세계에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 알게 하는 빛을 만나 모든 것을 바로 인식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목적을 이해하고 그 목적에 따라 다스리는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이기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된 것이다. 그 사람의 인생 안에.


바로 그 사람들이 사는 법, 하나님의 세계가 자기 가치관 안에 열린 사람들, 곧 구원받은 사람들의 세계가 움직이는 법, 그것이 바로 십계명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치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은 행동할 때 마다 법이 어떤가 생각지 않고 근원적으로 대한민국의 헌법에 동의하며 살기에 자유로운 것과 마찬가지다. 때로 법을 공부하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지만 나라를 붕괴시키려는 생각만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 나라에서 사는 것에 지장이 있다. 십계명도 마찬가지다. 애굽에서 건짐을 받은 세계의 삶도 그렇다. 십계명은 그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 


또한 달력(크로노스적인 시간)으로 구약시대의 말씀이기에 엄중함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엄중함을 안다고 경직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엄중함을 아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민으로 자유롭게 살고 때로 힘들기도 하지만 올림픽에서 애국가가 울려 나오면 가슴 뭉클함을 공유하는 것이 바로 엄중함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십계명은 지난 말씀도 아니고 문자 그대로 지키는 말씀도 아니다. 이것은 애굽의 가치관이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바뀐 사람들의 자유로운 삶의 모습이고, 그 삶의 울타리며 법이고 본성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 여호와

십계명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께서 ‘1계명이 무엇이다.’를 말씀하시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낸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이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존재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어느 것도 스스로 있는 것이 없다. 존재의 원인과 이유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그것이 궁금하다. 그래서 ‘우주의 기원’, ‘인류의 기원’과 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궁금해 한다. 궁금하다는 것은 있는데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스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스스로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사람과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사람에게 하나님이 신이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있는데 사람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여호와가 사람에게 신이 되시는 이유인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지만 사람은 스스로 있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관계의 가장 기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통틀어 공부 좀 한다는 모든 학자들이 깨우치고자 했던 것은 전부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것을 연구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직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공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인데 어떻게 우리 능력으로 우리 존재의 정체성을 밝힐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누가 부모인지도 부모가 아이를 낳아서 부모로서 길렀기에 아이가 그 부모를 아는 것이지, 스스로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볼 능력도 없는 것이 인간이다.


바로 그것을 알려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신이 되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스스로 알 수 없는데 그것을 알려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것은 우리 존재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것이지, 먹고 사는 문제, 육신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지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존재가 정해지면, 내가 누군지만 정해지면 자연스럽게 그 정체성에 따라 살아가게 되니, 하나님 앞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는 걱정할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정체성대로 사는 것은 내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날아가는 백조를 보는 것만으로 자신이 백조며 하늘로 날아가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미운 오래새끼의 교훈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낸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시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애굽이라는 세계는 소유와 공로로 승부하는 세계다. 공로가 크면 위로 올라가고, 소유가 많으면 위로 올라가는 세계다. 그 세계에서 위로 가기 위하여 진흙에 볏짚을 넣고, 또 불에 구워서 단단한 벽돌을 만들듯 흙으로 만들어진 자기 인생을 그렇게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애쓰는 그 애굽의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건져내셨다는 것은 사람이란 그렇게 사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셔서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이 되는 동시에 애굽의 법 아래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바로 그 법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나타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잘 이해가 되는 존재는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뜻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시니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즉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뜻, 곧 사람의 정체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받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애굽에서 건져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다. 자기 정체성, 인생으로 나서 인생을 인식하는 가운데 그 인생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 그것이다.(이것이 기도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이유를 가지신 신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즉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고, 자신이 하나님과 맺을 관계는 give & take의 관계가 아니라 존재의 관계, 서로 중 하나가 없으면 의미가 없어지는 2인칭의 관계로 만나야 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는 2인칭이다. 남편이 없으면 아내가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이 2인칭의 관계다. 그 관계가 정립되면 서로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두 정해지고 하게 되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또 아내가 남편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정해지는 것이다. 관계가 정립이 되면. 즉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의미가 있어지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매개체는 <존재>에 관한 것이다. 


나는 누구며, 왜 사는 것이며, 그런 문제에 있어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인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여호와로 만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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