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굽에서 건져 낸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모세가 살아 있을 당시 애굽(지금의 이집트)에 살았던 수천 년 전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각주: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굽에서 건져 낸 사람은 모세와 함께 홍해를 건넌 수천 년 전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어떤 세계, 애굽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세계에서 건져 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애굽으로 이름할 수 있는 세계는 사람이 있는 어떤 시대, 오고 가는 모든 세대에 있는 어떤 가치관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세계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도 있다는 것이다. 애굽이라 이름할 수 있는 그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건져낸 사람을 하나님께서 <너와 나>의 관계를 가진 사람으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주신 계명이 바로 십계명인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모세와 함께 홍해를 건넌 육신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굽에서 건져 낸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는 이 성경을 읽을 이유도 없고, 십계명은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애굽은 도무지 어떤 세계인가? 하나님께서 건져 내셨다는 세계는 어떤 가치관을 가진 세계를 말씀하시는 것인가?


애굽이라는 세계, 애굽이라는 가치관의 세계를 대표하는 것은 피라미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흔히 <세상적>이라는 말을 한다. 그렇게 말하는 세상적이라는 것, 그것의 대표가 바로 피라미드고 애굽이다. 이 세상적이라는 것은 육신의 능력과 소유로 경쟁해서 이긴 사람이 승자가 되는 세계, 곧 의로워지는 세계다. 의로워진다는 것은 그렇게 이기는 것이 <의>고 그 의를 기준으로 이긴 자가 선한 자가 되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애굽이다. 아니 세상이다.


우리 육신이 속한 이 세상은 언제나 그렇게 선한 자, 곧 이긴 자와 악한 자 곧 패자가 정해진다. 육신의 능력을 얼마나 발휘해서 세상이 의롭다 여기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의고, 이기면 선이고, 지면 악한 자가 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져서 종이 되면 죄가 되는 것이다. 죄인은 전쟁에서 진 자, 세상의 가치인 돈의 힘에 진 빚진 자가 바로 죄인이다. 그런 세계가 세상이다. 이것이 애굽이고 피라미드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신의 역량을 강화시키고, 더 많은 돈을 가지려 하고, 더 화려한 옷을 입는 신분을 얻으려 한다. 한마디로 사람을 단련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어떤 일을 했느냐 하면 벽돌을 만드는 일을 했다. 벽돌은 진흙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벽돌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볏짚을 넣었다. 생명이 있는 곡식의 알갱이가 아니라 껍데기요 죽은 것이 짚을 넣었다. 형식으로 사람을 강화하는 일을 했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가?


흙으로 벽돌을 만든 것은 애굽에서의 일이 최초가 아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에도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하늘에 이르려 했다. 자기의 뜻이 하늘에 닿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러려고 보니 사람이라는 존재 그대로는 되지 않겠더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흙으로 만든 벽돌을 굽거나 흙을 만들 때 짚을 넣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 그 자체로는 안 되니 사람 + α가 필요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사람 그대로는 하나님께 의롭게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가치관의 세계가 애굽이다.


이러한 것을 뒷받침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모세가 바로 왕에게 가서 백성들을 데리고 하나님께 례를 행하여야겠다고 하니 바로 왕이 내린 결정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바로 짚을 주지 않고 벽돌을 만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순수한 사람의 꼴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 봐라!”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아주 눈에 익은 모습이다. 바로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한 조롱이 그것이었다. 발가벗겨져서 사람의 모든 것이 드러난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지 그래?”라고 하는 조롱이 그것이다. 그들의 조롱과 바로가 짚을 주지 않고 벽돌을 만들어 보라고 한 것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본질적인 의미는 바로 “사람이 이 꼴을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마음에 늘 악한 생각, 틈만 나면 분한 생각을 하는 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롭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되니, ‘기도를 열심히 해라.’, ‘헌금 많이 해라.’ ‘성경을 읽어야 한다.’, ‘봉사해라.’와 같은 요구들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흙에 볏짚을 넣어 벽돌을 만들고 또 흙으로 만든 벽돌을 구워 단단하게 하여 그 수준이 더 이긴 자가 꼭대기에 올라가는 피라미드의 법, 또 그런 벽돌을 모아야 하늘에 오를 수 있다는 바벨의 법을 찾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애굽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애굽에 건져내셨다고 하시는 것은, 그런 가치관에서 건져내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가치관의 세계에서 건져내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너희>>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 세상에서 이겼다고 간주하는 의를 자기 삶의 의로 삼고 살던 세계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너희>라고 부르는 2인칭의 관계로 보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집트라는 세상의 나라에서 건져낸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육신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 육신을 연단해서 나오는 성과와 공로와 그 소유의 크기를 가지고 이긴 자가 되려는 가치관을 가지고서 사는 세계를 벗어난 사람이어야 이 십계명이 의미가 있는 계명이라는 것이다.


애굽에서 건져낸 사람, 하나님과 2인칭의 관계가 형성된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삶의 세계를 벗어난 사람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어야 십계명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아닌데 십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하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용없는 것이다. 그것은 간첩이 우리나라에서 온갖 법을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대하는 것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바로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믿기에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에 애굽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애굽이라는 세계, 세상의 가치관의 세계는 언제나 육신의 능력이 가져온 공로와 소유가 이긴 자가 되는 세계인데, 그것을 그렇게 본다는 것은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기에 그러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벗어난 사람은 당연히 십계명을 행동으로 지키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율법을 행위로 지켜낸 결과로 율법을 지켰느냐 아니냐를 보는 세계가 바로 애굽과 세상의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나왔다면 십계명을 행위로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너희>는 행위로 율법을, 아니 성경 말씀을 지켜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건져낸 사람들은 율법과 성경말씀을 행위로 지켜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1. 이 말씀을 보면서 애굽에서 건져낸 사람이 수천 년 전의 출애굽 당시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것은 또 어떤 이론인지 정말 궁금하긴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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