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는 하나의 종파(그것이 이단이냐 정통이냐를 떠나서)가 생길만큼 민감한 문제기도 하고, 또 기독교의 많은 교단들의 특징에서 주일(안식일이라고 주장)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대한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의 제 4계명이 말씀하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지키는 것일까요? 그리고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또 어떤 것이고, 한 가지 흥미로운 관점을 도출한다면 ‘왜 기억하여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1. 무엇이 안식인가?

2. 무엇을 기억하라는 말씀인가?

3. 거룩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4. 지킨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1. 무엇이 안식인가?



안식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사람이 안식한다는 것은 안식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주일날 예배시간에 늦지 않기 위하여 서두르다가 가스를 잠그지 않고 렌지에 뭔가를 올려놓고 왔다고 한다면 안식이 되겠습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비록 몸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혹은 주일을 지킨다고 교회에 가서 앉아 있는다고 안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상황은 흔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도 사람의 몸이 교회에 혹은 쉬는 장소에 있다고 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안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을 누리려면 안식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즉 사람이 안식에 적합한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태가 될 때 안식일까요? 그것에 답을 얻고자 한다면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고민, 그러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할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요? 돈일까요? 아니면 건강? 아니면 자식이나 가족 문제? 물론 그런 것은 상황에 따라 큰 걱정이기는 하지만 인류, 인생이라는 존재, the Man이 공통적으로 가진 근심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a problem입니다.


모든 인생,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가지게 되는 공통된 문제며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절대로 쉴 수 없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 혹은 ‘왜 사는가?’하는 존재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평생을 들여 수고하는 것이 바로 이것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돈이 인생의 목표, 즉 자신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한다고 여겨 돈 버는 것에 집착하고, 그와 같이 어떤 이는 명예, 어떤 이는 자녀 특히 아들에게서 그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끊임없는 수고가 답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목적으로 또 삶의 의미로 살아간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가 되어서 ‘인생은 허무하다.’, ‘인생은 무(無)다.’라고 푸념하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인생을 산 사람은 안식이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자기가 삶의 의미라고 여긴 것이 일순간 채워져서 만족하는 순간들이 있지만 그것은 안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은 다시 문제에 빠지거나 돌아가지 않는 온전한 안식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천지창조의 과정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안식이라는 개념의 근본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칠일 째에 안식하신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달성되었기에 안식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존재가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자 하나님께서 창조를 끝내고 안식하실 수 있게 한 창조는 다름이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묘한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안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신 것은 바로 사람,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사람이 나왔기 때문에 안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식은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이라 인정하는 존재가 나왔기 때문에 목적이 달성되었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안식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의 영광(나타나심)과 성품을 표현하시려는 뜻을 세상이라는 형식을 표현하시겠다는 계획이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을 통해서, 사람을 보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겠다는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곧 온전한 사람,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나올 때 비로소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의 말씀(계획)이 육신(형식)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고 안식하셨는데 그 일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기억하고 그 창조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존재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안식하심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안식할 수 있는 존재, 누가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존재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만족하시고 안식하신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라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안식을 가져올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이므로 하나님께서 쉬신다면 그 존재도 당연히 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사람이어야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 아니 사람에게 어떤 근심이 해결되어야 안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 삶의 의미, 인생의 목적, 이 육신을 가진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자기 안에 분명해진 사람이어야 안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분명하게 밝아져서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은 바로 안식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까 안식할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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