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몸으로 성경에 조문을 지켜 행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면 예수님도 낙제생에 불과하다. 그 당시 행동을 지켜내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 유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볼 때 예수님은 거의 반항아적으로 계명을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성경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될 수 있겠는가? 먼저는 대언자가 되기에 자신도 자격이 없고, 더욱이 행함으로 지키는 것이라면 생명의 관계인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되는 것은 더 안 되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아노라 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고 진리가 그 안에 없다고 한 것이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와 목적을 떠나서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행함으로 성경의 조문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과, 육신을 부정하게 여겨 마음대로 사는 자들을 다 같이 말하는 것이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신호등이 녹색일 때 건너야 한다는 것을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욕망을 좇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욕망과 한계와 본성과 연약함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개는 도둑으로부터 주인을 지키는 것을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개가 가진 사람에 대한 충성스런 본성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를 키우는 것이다. 개의 그 본성을 사람이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가진 이 연약함과 한계와 본성이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나타내시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사람을 아들로 삼으시는 것이지, 사람이 의지로 하나님의 아들의 노릇이나 흉내를 내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목적이 자기 안에서 밝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그 법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도무지 실패할 수 없는 것이다. 강아지가 개로 사는 것에 실패하겠는가? 그럴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그 유전자의 계명을 못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계명으로 받아 지켜 행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이 가진 추함을 율법으로 감추려 애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기를 원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계명은 어길 수조차 없는 삶이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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