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1장 5-10절) 어두움이 없는 빛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9. 17. 16:20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빛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는 것은 생명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아주 쉬운 것이 된다. 즉 어떤 생명이든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동안은 100% 그 생명으로 산다는 점을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다 고양이고, 소나무는 잎부터 뿌리까지 모두 소나무인 것과 같다.


하나님의 빛도 생명과 같이 사람에게 사람이 무엇인지, 또한 하나님이 누구시며 또한 사람과 어떤 관계인지를 아는 것은 생명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늘 생명의 아버지라는 의미로 성경에 나오는 것이다.


어떤 동물이나 식물이 그 유전자에 의해 태어나고 온전히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빛을 만난 사람 또한 100% 온전한 인식 곧 밝음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구원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이다. 거듭남은 생명과 관련된 단어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에는 분명한 방향성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생명은 태어남으로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이지, 그 생명의 흉내나 모양을 갖춘다고 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이렇게 해야 그리스도인이 된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 방향성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믿는 사람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 있을 수가 없다. 거듭남 곧 생명으로 난 것은 죽일 수는 있어도 그 생명의 본성을 제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정의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 노력해서 채워가는 것이나, 부족함은 없다. 이건 온전한 것이다. 생물학적, 의학적으로 볼 때 사람은 어떤 짓을 해도, 또 어떤 모양을 해도, 또한 전쟁에서 신체의 일부를 잃어도 사람이다. 이것은 노력으로 채우는 것이나, 기도해서 메꾸어 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대하면서 온전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부담을 가지고 있다. 이는 먼저 자신이 온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사람이라는 생명의 기준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사람에 대한 기준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명제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자연인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사회인으로서의 사람이다. 


이것이 혼돈되면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죄와 관련한 개념도 이러한 점에서 늘 혼돈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하게 여기시는 것에 대하여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도둑질과 같은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굳이 하나님께 빌지 않아도 세상의 법에 따라 처벌을 받으면 된다. 그런 것은 다 행위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죄에 대하여와 행위 기반의 명제를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고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아슬아슬한 논리 같지만 하나님이 존재의 하나님이신데 행위에 대하여 죄를 논할 이유가 없는 것이 근간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만 고백되면 살인해도 된다는 말이냐?’라고 할 것이다.


살인? 할 수 있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살인죄를 용서 받았다고 한다거나 괜찮다고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살인이 죄가 되는 상황과 사회 혹은 국가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 시대, 그 사회, 그 국가가 정한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명백한 법이 있는데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나는 죄 사함 받았다.’고 하는 것은 미신이고 미친 소리다.





2007년에 개봉한 영화 <밀양>에 나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들을 유괴 살해한 범인이 교도소에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다 용서 받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다시 생각해야한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 행위는 사람이 사람끼리 만든 법으로 심판하고, 또한 서로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행위로 사람에게 지은 죄를 존재이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교리에 입각해서 그렇게 고백했으면 죄가 사라진다고 믿는 것은 비겁하고 교활한 마음일 뿐이다.


행위로 지은 죄는 행위에 대하여 규정하고 심판하는 이 세상의 법에 따라 용서를 구하고 심판을 받으며 죄 값을 치를 수 있는 대로 치러야 하는 것이지, 뻔뻔하게 예수 믿으니 괜찮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행위로 지은 죄를 하나님께서 사하실 것이라고 믿는 그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회개할 것은 자신이 그렇게 행위를 기반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살인과 같은 행위로 범한 죄에 무관심하신 분은 아니시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서 사람을 죽일 정도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그런 범죄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인의 예만 본다면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여서라도 주장하고 싶은 자신의 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나, 사람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챙겨야겠다고 스스로 정한 의의 법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일 만큼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어떤 일에 대하여 그런 선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 마음이 바로 가인의 마음이고, 그 마음의 뿌리가 바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죄로서의 살인은 사람을 죽여서라도 입증하고 싶은 스스로의 선한 기준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회개하고, 살인이라는 그 행위 자체는 세상의 법에 따라 심판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온전한 법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갔는데, 살인이라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 한 것은 살인과 같은 끔찍한 사례가 아니라도 사람들은 행위 규범에 대하여 스스로 온전하다고 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다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런 마음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낸 유대 제사장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완전치 않은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는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사람이 온전할 수 있느냐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움츠리고 또한 다른 사람을 보고 심판하는 그 마음이 바로 유대 제사장들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그 마음과 생각의 어느 한 구석에라도 행위 규범이 미치지 않은 곳이 있는가?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고,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생명의 관계 역시 아들이 어떤 행위로 아버지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정체성도 그런 것이다. 행위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정하신 목적을 표현하며 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창조주로서 가지고 계신 나의 존재 목적과, 사람이 어떠해야 선한 것인지를 알려고 하는 것이지, 스스로 선함을 정하고 스스로 삶의 목적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스스로 정하는 것은 아들이 성씨를 정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사함을 구해야 하는 유일한 죄이다. 그 외에 행위로서 지은 죄는 그 시대의 법으로 갚고, 또한 피해를 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행위로 지은 죄가 있어 서로에게 해를 입히고 또 서로가 화해한 이력이 있다 하여 하나님께서 허물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다 아실 뿐 아니라, 그런 사람의 정체성을 보고 '보시기에 심이 좋았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쩌면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다. 이산화탄소를 내 품으니 말이다. 사람은 행위로 선해질 수 없는 존재이다. 이것을 부인하면 안 된다. 그것이 가장 큰 죄고 그것이 영지주의다.


사람이 행위로 온전해질 수 없는 것은 사람의 행위가 온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법 때문에 늘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 대표중의 대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그리스도를 보고 나도 예수님과 같이 사람들의 법 앞에서 늘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빛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와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위 규범으로 사람을 죄인 만드는 것을 깨우치시려 하다 보이신 일로 인하여 행위 규범으로 사람을 죄인 만드는 법에 의하여 신성 모독이 되고, 반역자가 된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의 실체이다.


그 십자가를 보고 빛이 비췬 사람은 자신도 세상을 살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과 같이 말이다. 그것이 바로 빛이다. 그 빛이 비췬 사람은 더 이상 어두움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사람이 행위로 온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든 존재에서 그것이 아님을 아닌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 그것이 바로 온전한 거듭남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람으로서 가진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빛, 그 생명을 비췸 받고 거듭 태어난 사람은 그 빛 안에서 살고,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것이다. 생명이 그 본성대로 사는 것에 있어 그 생명의 유전자로 볼 때 어두움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어두움이 없으신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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