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생자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일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고, 그 영광을 보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증거하고 있다.(요 1:14)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말씀이다. 이 독생자는 요한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생각처럼 예수님께서 독생자라는 것이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의 그 몸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독생자는 하나 밖에 없는 방법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예수라는 이름 되에 구원을 얻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만약에 그것이 아니라,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의 몸 자체가 독생자라는 것으로 이것을 본다면 그런 독생자가 있는데 다른 아들이 굳이 그렇게 필요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면서 까지 다른 아들을 얻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생자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나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들은 성경을 믿을 이유가 없다. 예수님의 몸과 같이 될 방법이 다시 있다면 모를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나에게 아들이 있다.’라는 것을 자랑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을 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표상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독생자이신 것이다.


사람들이 <독생자>라는 말을 들을 때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유일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예수님은 유일하시다. 다른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적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실패하지 않았는데 왜 다시 오시겠는가? 하지만 그 때 그 예수님의 몸과 삶을 독생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역시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의 몸을 독생자로 보느냐? 아니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이유가 유일한 것이냐? 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을 믿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a christ)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도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했다는 것은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을 얻기 위하심인데, 예수님만이 독생자면 나머지는 뭐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아니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니까 사람이라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이 단 하나이기 때문에 이를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요한복음을 읽고서 이 말씀이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독생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고, 그 목적이 요한사도 안에서 생명이 되어 쓴 책이 요한복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반복하는 말이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그러니까 오늘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영광

그것이 또한 영광이라고 요한 사도는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영광이다. 영광은 ‘나타나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 역시 그렇게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영광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영광이라고 하면 세상에서 경쟁해서 이긴 것을 이야기하거나,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나타나면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경쟁하여 이겨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타락(구약의 모든 선지서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타락이 바로 이것이다.)이다. 또한 기도하여 이루어진 것이 영광이라는 것은 맞지만 기도란 바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명을 구하는 것이 기도지, 세상의 일을 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영광이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말씀과 성품과 생명이 나타나는 것을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지, 사람이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 아닌데 나타났다면 그것이 바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것에 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의를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유일한 방법이 사람을 통하여 나타난 것, 그것이다. 오히려 사람은 오직 그것 하나만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사람의 유일한 존재 목적, 그것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 그것이 바로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은혜

그 독생자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다. 은혜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가 필요한 것을 기도하여 얻은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하나님이 아니시면 누가 사람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겠는가? 그럼으로 존재 자체가 은혜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적어도 태어나지 않은 것 보다 자신이 사람으로 나서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한 일이라는 마음이 없는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흔히들 시상대 위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수상소감을 할 수 있게 된 것과 같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아는 것은 큰 함정이 있다. 바로 경쟁에서 진다는 것은 은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기지 못한 삶은 실패한 삶이라는 전제가 깔린 감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태어나 보니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안 되겠다는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즉 태어났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나 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시겠다는 뜻을 시행하셨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사람만이 아는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다. 그것이 아니라 자기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 것은 자기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언뜻 사람에게 산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기 어려울 수 있다. 그것은 육신의 문제가 본질이라고 알면서 살다보면 도저치 태어났다는 것 그것이 은혜와 영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를 통하여 표현하시겠다는 것이 나의 존재 목적이 된다면 그 영광스러움과 은혜의 감사는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은혜다. 요한 사도가 전하는 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서 그 뜻을 자신을 통해서 나타내시려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은혜가 충만했던 것이다.


진리

그리고 또한 은혜 뿐 아니라 진리도 충만하다고 했다. 그것 역시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통하여 알게 된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을 때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의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사람에게 진리라는 것이다.


진리라는 정의는 굳이 필요 없을 것이다. 진리에 반대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거짓’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짓을 싫어하신다는 것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거짓은 다름 아닌 존재의 목적과 행위가 다른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망치로 사과를 깎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사람의 삶이 다른 것, 그것이 바로 <거짓>이다.


예수님이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육신의 존재 목적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너무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셨으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삶이 하나이니 온전한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도, 요한 사도의 심령 안에 예수님이 보여준 삶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삶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그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요한 사도 마음에 예수님의 삶이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일치한다는 것임을 알았고, 그것이 참 진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진리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 하나 하나를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과 사람의 삶이 일치가 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씀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인데(개인적일 수 있음)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의 무엇이라도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그 용도대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바로 자유다.(그래서 물고기가 물 속에 있는 것이 자유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리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을 보이신 분이시고, 그 보이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기에 사람에게 은혜이며, 그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온전히 이루어져서 사람의 삶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과 일치가 된 것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독생자시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도 그와 같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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