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18) 영접하는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1. 2. 12:09 Writer : 김홍덕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자기 땅>에 오신 것이라고 했다(요 1:11) 자기 땅에 왔는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했다. 왜 그것이 어두움인가 하면 자기 땅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사람과 세상 곧 백성들의 빛이시기에 그 빛을 몰라본다는 것은 어두움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빛은 모르기가 더 어렵다. 눈을 감고 있어도 빛이 비취면 아는 것이 빛이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빛이 어두움에 비쳤는데 어두움이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것은 이 빛이 우리가 아는 그 빛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빛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인식>과 <깨달음>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미디어의 발달로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이름은 들었다고 봐야 한다. 영어권에서는 Jesus라는 단어가 ‘맙소사!’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정도니 예수님의 실존에 대하여 모르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바로 이것이 어두움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의도, 그것을 모르면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때로 신학이나 고고학 혹은 역사학적으로 그 실존을 확신하다고 해도 아무소용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그렇게 연구나 하라고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세상에 오신 빛인 예수님을 아는 것인가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영접하는 자”는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1-12)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영접하지 않는 자 = 어두움에 비친 빛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자>, 그리고 <영접하는 자 =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문맥만 읽을 수 있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영접하는 것이고, 무엇이 믿는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빛은 조명이나 물리적인 광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빛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빛의 개념이 표현된 형식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빛은 목적이 의미가 있어지는 깨달음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사람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시작에 함께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 그것이 빛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질 때에 예수님이 빛인 것이다.


요즈음은 컴퓨터가 어디에나 있다. 길가다가도 천원만 주면 한 시간씩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컴퓨터다. 하지만 컴맹에게는 가을 길의 낙엽처럼 컴퓨터가 널려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것처럼 예수님에 대하여 매일 듣고 매일 새벽에 가서 부르짖어도 예수님의 존재 목적, 곧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위하여 보내신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컴퓨터를 가지고 밭을 갈면서 자신에게 컴퓨터가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을 두고 컴퓨터가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영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접의 사전적 의미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과 이유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그렇지 않고 자기 맘대로 컴퓨터로 밭 갈면서 유용하다 여김과 같이 예수님을 자기 생각대로 믿는 것이 바로 세상에 비친 빛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묵상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는 것이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대구를 대표하는 성당 앞을 지나게 된다. 성당 앞에는 미사 안내(?)와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중에서 <자동차 축복>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정말로 허망함을 느낀다. ‘예수님이 자동차 축복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인가?’하는 생각에.


그것은 비단 그 성당의 안내문의 문제가 아니다. 잘 생각해보면 교회나 성당이나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은 늘 사람이 살아가는 육신의 삶을 안위하고. 육신의 삶에 관한 것에 복 주시는 분 이상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에 가서 선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가서 전하는 것이 결국 그것이라면 다를 것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냥 세상의 모든 신들 중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인생의 문제를 더 잘 해결하시는 분이라는 믿음 그 뿐이다.


단연코 그런 신앙은 영접하는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어두운 신앙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영접한다는 것이지, 하나님을 이용하거나 보급계로 생각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흉측한 일들 면하고, 같은 시험이나 경쟁에서 남들보다 잘 된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하고 보급계로 여기는 것이지 영접하는 것이 아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영접하는 대상의 뜻을 받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오실 곳에 오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땅이 예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말씀이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곧 땅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 땅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땅에 오셨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면 빛이 어두움에 비쳤음에도 알지 못하는 어두움인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인 것이다. 이름은 정체성인데, 하나님의 이름 ‘기도하면 필요한 것 주시는 자’라든가, ‘수고하면 상 주는 자’라든가, ‘자기 소유를 많이 바치면 축복하는 자’와 같은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신들이 따로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바알이요 아세인 것이다. 즉 이방신이고, 우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생이 살 동안 겪는 일을 안위하고, 세상에서 육신이 하는 일을 남보다 잘 되게 복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이방신으로 섬기는 것이다. 즉 문맹이 글자로 표시된 사람의 뜻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자신의 수고와 소유의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와 또한 내세에서 하나님을 그렇게 섬지 않은 사람과 달리 복 주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다 어두움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미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 땅에 비친 빛을 깨닫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안위를 살피신다고 영접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뜻이 온전히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자기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존재 목적과 이유가 바로 뒤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이 되는 것, 그것이다.


이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시는 것, 곧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아들이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땅은 하늘의 기운을 표현한다. 하늘이 차가우면 땅의 모든 것이 춥고, 하늘이 따뜻하면 땅의 모든 것이 덥다. 차고 더운 것은 영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땅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의도(그것이 가장 기초적인 종족보존의 본능이라 해도)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표현된 것이 아들인 것도 마찬가지 법이다. 


그렇게 될 때 사람이 하나님의 땅, 곧 자기 땅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영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빛을 영접한다는 것은 인식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 존재의 목적 그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들이고, 그것이 빛이 비친 것이고, 그것이 태초이며, 그것 하나님의 세계와 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영접한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 그것을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로 영접한다는 것, 그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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