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이 와서 메시야를 만났으니 가 보자고 했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했던 나다나엘은 사람을 메시야라고 만나보자는 빌립의 말을 좇아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은 육신의 어떠함이 선함이라는 가치관이다. 육신의 행실과 모양이 선의 근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은 사람이 메시야라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사람의 추함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자신의 가치관을 넘어서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런 나다나엘의 모습을 예수님은 ‘간사함이 없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네(나다나엘)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라고 하신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언제 나를 봤단 말입니까?”라는 식의 의문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러자 한술 더 떠서 예수님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하시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셨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47-51)


이 대화는 극적이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은 정말로 대단한 능력을 가지셨나 보다, 그냥 한 마디만 하면 사람이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시는구나!’로 읽으면 곤란하다. 물론 예수님의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예수님의 능력이 사람이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굴복하게 하시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보여준 이 대화 속의 반응은 예수님의 능력에 자신의 의지가 제압당한 것이 아니다. 나다나엘의 속에서 무엇인가가 밖으로 표현된 것이다.(신앙이라는 것이 사람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면 예수님의 능력도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제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화과는 율법의 나무, 이스라엘의 나무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고, 아담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사용한 잎이 무화과 나뭇잎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무화과나무는 율법의 나무이다.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내면 육신의 부끄러움이 감추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경을 몸으로 지켜 행하면 인생이 가진 연약함과 추함이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것이다.(인생이 추하고 연약한 것은 사람의 기준이지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고 하신 것은 나다나엘이 율법 아래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그랬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그 고백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인식이다.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지창조에 있어 가장 먼저 빛을 만드신 것이다. 빛이 곧 인식이고, 빛이 있어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다나엘은 자신이 무화과나무 곧 율법의 가치관 아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이다. 이것을 성경에서 다른 말로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나다나엘이 도적질과 같은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다. 무화과나무 밑은 인생이 거할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자리를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가진 ‘하말티아’가 원어인 것이다.


무화과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담의 범죄다. 그래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볼 때 부끄러운 인간의 정체성을 가리려 한 것이다. 율법으로 사람의 연약함을 가리려 하는 것이 그것이다. 나다나엘이 무화과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무화과의 가치관, 곧 선악과를 먹은 가치관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이 스스로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할 때, 자신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존재였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하는 그 가치관을 고수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당연히 빌립을 따라 예수님께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기 가치관을 넘어서서 예수님을 만났고, 그 예수님께서 자신의 자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가 아니라 선악의 가치관을 가진 무화과나무 아래, 곧 사람이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율법의 기준을 자기 의로 가진 자리에 있었다고 할 때 그것이 인정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죄를 자복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회개, 돌아섬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는 것은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사람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과 같은 천한 동네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은 추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보고, 그것도 나사렛 출신에 비슷한 동네인 갈릴리에서 살고 있는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것은 대단한 반전인 것이다.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 싶은 모습을 가진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율법 아래 있었다는 것,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사람이었다는 것,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모습을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추하고 연약한 것으로 보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 고백이 없었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든 믿음은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소유와 공로의 신으로 모독하고 있는 것을 신앙이라 착각하는 사람일 뿐이다.


반면에 그런 고백이 있는 사람은 하늘이 열린다고 하셨다. 이 고백이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아들 삼으심을 믿는 고백이다. 그 고백, 그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을 때와는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시작을 개천절이라고 하듯이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고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앞에서 말한 세상에 비친 빛이 나다나엘에게 또 그 고백이 있는 사람에게 비취었다는 것이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 그것은 주기도문에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 하늘의 뜻은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사람을 만났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 하늘이 열리는 것이고, 하늘의 뜻이 땅(사람)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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