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과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빌립을 만나서 역시 ‘나를 좇으라.’고 하시니 따라 갔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스치듯 지나가다가 예수님께서 부르시니까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좇아갔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삶이 가서 보고 싶은 삶이고 그것을 빌립이 봤기 때문에 오라니 따라간 것이다. 안드레 역시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 물으심에 ‘어디에 계십니까?(당신은 누구십니까?)’ 물었더니 와 보라고 하신 자리에 가서 보니 형 베드로에게 말할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만난 사람이 바로 메시야더라는 것이다. 사람을 만났는데, 육신을 가진 인생의 삶을 보았는데 메시야였고, 그 삶을 보았는데 오라니 가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난 빌립은 나다나엘을 데리고 예수님께 갔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데리고 왔듯 나다나엘을 데리고 간 것이다. 그런데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만나러 가자고 하니 나다나엘은 ‘누구를 만나자는 것이냐?’ 반문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랬더니 빌립은 <나사렛 예수>를 만나자고 했더니, 나다나엘의 말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했다. 이것은 나다나엘이 율법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나다나엘이 말하는 <선한 것>도 하나님의 선하심과는 다른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가진 선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과 같은 천한 동네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다나엘의 생각은 사람을 외모로 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율법이라는 것이 그렇다. 사람의 행동과 모양새가 어떻게 되어야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시 나사렛은 천한 동네다. 뭐랄까 달동네 같은 곳? 그런 곳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한 것은 천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도 만연하다. 기왕이면 더 큰 교회에 다녀야 한다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사람이 행동으로 성경을 지켜내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은 한마디로 이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 그것이 천한 동네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고, 큰 교회가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큰 결단을 내렸다. 빌립을 따라 간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듯 말 듯 하지만 이건 중요한 것이다. 자기의 가지관으로는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사렛이나 별반 다를 것 없는 갈릴리의 빌립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는데 따라 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보통일이 아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기성교회에 다니면서 어딘가 해결되지 않는 신앙의 의문들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사람이 와서 성경이 말하는 것이 이것이라고 말한다고 쉽게 가지는 않는다. 물론 그냥 가서는 안 된다. 지금 나다나엘에게 오라고 하고 있는 빌립은 사람이다. 빌립은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의 삶을 본 사람이다. 그것을 보았더니 성경에서 이른 이가 바로 이 분이라는 것을 보았기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성경을 가지고 어떤 관점 어떤 해석을 한다고 할 때, 그 추구하는 바가 육신의 문제에 관한 것이라면, 육신의 문제를 더 잘 해결하는 방법을 성경에서 찾아 주는 것과 같은 것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따라 나설 필요가 없다. 그것은 개진도진이기 때문이다. 이단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신데 소유와 행위에 관한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이단이다.


행위와 소유에 관한 선함의 기준으로 보면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 나다나엘은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한 제자들이 가서 보니 10시 곧 밝음이 있음을 알게 된 제자들이 와서 전할 때에 나다나엘은 자신의 가치관을 뒤로 하고 따라 나선 것이다. 오늘날도 이런 안목이 필요하다. 성경을 보고서 행위와 소유에 관한 말씀으로 보고, 하나님을 우리가 육신으로 이 땅에 사는 동안 겪게 되는 일들을 잘 해결해 주시고 필요한 것 공급해 주시는 분으로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하는 신앙관에서 존재의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기 가치관을 버리고 따라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간사하다는 것은 계산적이며 이기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렇다. 이 블로그에서 언제나 말하는 것이지만 나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누구의 유익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더니 나 자신이 이 땅에 살 동안 평안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믿음인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이 유익인 것이다. 그것이 간사한 신앙이다.


얼마 전 글에서도 말했듯이, 사람이 자동차를 위하여 자동차를 만들거나 사지 않는다. 자동차는 전적으로 만드는 사람에게 경제적 이익을, 사는 사람에게 편리를 제공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즉 주인이 혜택을 받는 것이지, 자동차를 위하여 자동차를 만들거나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만들었다는 그 하나만 제대로 믿는다고 해도 기도가 달라진다. 믿음이 달라진다. 자신의 육신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저 이 인생은 하나님의 의와 말씀을 표현하는 도구로 쓰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감사하고 기쁘며 그것이 은혜임을 아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죽어서 버릴 이 육신이 살 동안에 육신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느 것이 더 영광스러운가? 하나님께서 이 썩어질 육신을 이 땅에 만들어 보내 놓고 수명동안 보살피는 것이 다른 신과 다르다는 것이 영광스러운가? 아니면 이 인생이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 그것이 더 영광스러운가? 이 단순한 것을 몰라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물건을 만들 때는 다 격을 맞춘다. 왕이 마시는 잔과 종이 마시는 잔을 같게 만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제이신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드신 사람의 격이 어떻겠는가? 하나님과 같은 격인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인데 사람들은 그 존재의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의 하나님으로 늘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죄지, 사람의 원래 모습이 죄가 아니다. 하나님께 돈 달라, 여(남)자 달라, 직장 달라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고 죄인인 것이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늘상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라고는 육신의 문제들을 안위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죄인 것이다.


나다나엘은 그 자리를 떠난 것이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자신의 가치관을 떠나서 사람을 만났는데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는 빌립을 따라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러 간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안위를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심으로 인생의 이익을 누리는 자기 유익을 포기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간사함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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