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성경 창세기, 요한복음, 요한1서는 <태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 외에도 마태, 마가, 누가 역시 표현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시작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와 같은 말씀의 시작들 역시 어떤 새로운 시작이 있고, 그 시작에 대하여 말씀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요한사도는 그 세계의 시작이 바로 <태초> 곧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시작을 하는 것이다.


이 시작은 하나님의 세계이다. 사람들은 ‘태초’라고 하면 이 물리적인 세상을 먼저 생각한다. 이 물리적인 세상은 어떤 때에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믿으려 한다. 그러나 과학과 상식의 벽에 부딪히곤 한다. 때론 그런 의심이 믿음 없는 것이라 심판하거나 받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세계가 자기 안에 열린 사람은 이 물리적인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로 보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의 안목이기 때문이다.


요한사도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으로 인하여 다른 세계가 시작되는 것, 즉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가 있는데 그 태초는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풀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사람에게 이 세상은 이전과 다르게 하나님의 세계로 인식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요한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말씀하시겠다는 것이다. 즉 이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세계임을 볼 수 있는 세계가 열린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시작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을 아주 쉽게 말한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더 간략하게 말하면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는 세계,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세계이며, 그 세계는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태초에 계신 그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세계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시작하는 하나님의 세계라는 말씀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 곧 the Christ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 이미지가 자기 심령 안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잉태되고 생명이 된 또 하나의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인이라고도 하는 a christ를 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또 예수님을 믿는다. 그런데 정말로 왜 믿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 땅에서 살 동안 육신이 겪는 일들에 대한 안위를 얻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바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을, 예수님을 믿는 본질인가 하는 것이다. 그 보다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것과 같은 일은 또 어떤가? 한 평생 남을 위하여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은 어떤가? 그런 것 중에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그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즉 믿음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사람에게,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일에 자신이 순종하겠다는 믿음 그 하나뿐이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순교하거나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자기 삶을 통하여 나타내려고 하다 보니 보이는 삶의 한 모습들이지 그 모습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순교나 기도하는 일이나 봉사하는 일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도구이지 그것이 믿음 자체는 아닌 것이다.(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예수 믿어서 일신상의 안위를 보장 받겠다는 것은 예수 미신일 뿐 그런 것은 신앙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삶의 모습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의 삶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 보이는 그런 세계를 사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세계를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삶이 시작되는 시점 그때가 태초이고, 그런 삶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사도가 요한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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