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쿼바디스>를 보고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 4. 11:35 Writer : 김홍덕

지난 성탄절 오후 아내와 함께 영화 쿼바디스를 관람하러 갔다. 영화는 다소간의 기독교계 반발도 있고 해서 큰 영화관이 아닌 옛날 소극장 같은 곳에서 상영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일주일에 몇 회 정도. 내가 사는 대구에서는 동성 아트홀이라는 곳에서 하고 있는데 집에서 멀지 않고 마침 상영 회차가 있어 다녀왔다.





영화는 기독교의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로마에서 제도화 되고, 유럽에 가서 문화가 되고, 미국에 가서 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대기업이 되었다."라는 영화 속의 말의 이 영화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불 수 있겠다.


영화는 주제는 분명하지만 시나리오나 구성은 없고 추적 60분 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다. 교회 세습, 목사의 횡령과 성추행 사건과 같은 것을 시작과 끝에 사랑의 교회의 입이 쩍 벌어지는 새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며 그 안에 다 녹이려 한 것 같았다.


이런 고발들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은 단순하다. 가장 먼저는 '문제구만!'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보면서 교회가 좋아지기는 힘들 것이다. 나 역시 보면서 평소에 가진 생각인 <평신도에 의한 교회>가 제도적으로는 적어도 지금의 한국교회보다는 나은 것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고발들은 "이래서는 안됩니다"이다. 대안이 없다. 물론 그 안에 '이래서는 안됩니다. 이러지 맙시다'라는 대안은 있지만, 그건 명확한 대안은 아니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뭐 이전에 모르던 내용을 새롭게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영화를 보고 C.C.C도 사위에게 세습을 했다는 말초적인 사실도 새로운 것으로 친다면 모를까?


한국교회는 분명이 쇠퇴하고 있다. 아무리 교인들이 뭐라해도 반등을 시킬 동력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제도적으로나 상황적으로 대세가 기울어진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건 우리 같은 평교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개가 짖는다고 기차가 서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신앙이란 대세의 문제가 아니다. 엘리야의 때에도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칠천이 있었듯 하나님께서 아직 세상을 그냥 두시는 것은 어떤 기쁨과 만족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똥 싸고 울기만 하는 갓난 아기가 어쩌다 한번 웃어주는 그것이 그 모든 수고를 잊게하는 것 처럼 말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하는 공동체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교회가 정말로 교회 다울 때 그렇다는 것이지, 교회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한국교회의 모습과 같다면 그건 모양은 교회지만 정말로 '(주)예수그리스도'라는 거대 기업, 그것도 목사가 세습할 수 있는 사기업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그런 모습을 고발한 영화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대안이라는 것은 "이러지 맙시다!!'정도이다. 하지만 진정한 대안은 "이렇게 합시다,"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것에도 맹점이 있다. 그건 뭔가를 주장하는 것은 쉽다. 물론 바른 것을 말할 정도로 맑은 가치관을 가지는 것이 어렵기에 정말로 바른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건 다행일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대안은 제도나 혁명적인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교회가 바로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은 아주 작은 것에 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앙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자신의 삶을 묵묵히 깨달은 바 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이런 고발들에 대한 대안을 제도적으로 수립하자거나 뭐 혁신적인 계기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부패가 너무 만연해서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아무리 병들었어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한 신앙의 모습을 회복해서 살아가면, 그 사람을 보고 사람들이 십자가 밑의 백부장과 같이 진정한 예수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안은 정말 그것 뿐이다. 진정 그것 뿐이다. 어두움은 물러가게 하는 것은 물러가라고 외치는 소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빛 하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패를 물리치자 외치고 고발하는 영화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그것이 진정 교회를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그렇게 묵묵히 살아가는 삶, 그 삶은 칠흙 같은 어두움과 같은 세상과 교회 앞에 성냥불 같을지라도 그런 빛이 필요하다. 당장 오늘 나의 빛으로 해결되지 않아도 어느 날 그 작은 성냥 불빛이 밝아오는 새벽 빛과 함께 같은 빛으로 하나되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의 희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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