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6:10-20) 전신갑주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8. 30. 10:03 Writer : 김홍덕

누구와의 어떤 싸움인가?


전신갑주에 관한 말씀은 유명한 말씀인데 이 말씀을 잘 아는 정도라면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하여 관심이 좀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에도 나옵니다. 전신갑주를 입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떤 싸움에 임하는 준비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싸움이 어떤 싸움인지를 아는 것이 가장 먼저일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싸움은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wrestle나 struggle와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fight와는 달리 자기 몸으로 겨루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말 번역도 씨름이라고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우리의 육신, 육신의 삶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싸움의 형식은 몸으로 싸우고 다투는 것인데 정작 바울사도는 이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이 육신의 삶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이 육신의 삶이 어떤 목적에 귀속되고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육신의 삶이 세상의 주관자들이 추구하는 것을 좇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정한 삶을 사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신갑주의 배경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주제 중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우리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이 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기계처럼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목적대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생들이 그렇게 부르짖는 자유라는 것의 뿌리인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가 주어진 이유입니다.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선악과는 바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셨습니다. 이 육신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육신을 스스로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은 창조주와 같이 되려는 것입니다. 창조하신 것을 창조하지 않은 자가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 육신을 가지고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삶을 사는 것이 사람입니다. 자기 안에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소한 일 하나에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는 기준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다툽니다. 내가 더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옳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수가 공감하는 기준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하나의 사건으로 엮은 것이 바로 사람이 선악과를 먹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여 우리에게 주신 육신 가진 삶을 스스로 창조도 선택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도적질한 자기 존재 정체성을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삶의 동력을 만들고 그것을 모아 세상의 가치관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으로 보면 죽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정면으로 충돌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게 위하여 만든 사람이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의로 볼 때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자기가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니 대단한 것 같다고 여깁니다. 먹음직하단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로 육신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 스스로가 가진 의의 기준을 좇으려 하니 사람이 너무 부족하고 연약하며 심지어 자기 기준으로 볼 때 악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연단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 경건해지려고 합니다. 육신을 단련하여 의로워지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인 흙에 짚을 넣고 불로 연단하여 벽돌을 만들어 하늘에 이르려 한 바벨탑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인생을 자기 것으로 삼아 자기 안에 있는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어이없게도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합니다. 하늘의 뜻을 운운하면서. 또 각 종 신을 만들어서. 그것이 바로 우상을 조각한 것입니다. 성경대로 살면(행동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도 우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타락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공통의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서로가 가진 선의 기준을 비교하고 공통된 것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아서 그것을 고도화하는 것입니다. 피라미드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것에서부터 재산이나 권력의 많음까지 그렇게 세상적인 가치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는 사람들이 가진 선함의 기준을 모아 형성했기 때문에 그것이 공 사회의 정의, 곧 사람들의 의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지탱하는 큰 기둥 중의 하나가 바로 육신에 관한 관점입니다. 육신의 삶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과, 그 육신이 사람들이 가진 선의 기준으로 정립한 세상적인 가치를 이루는 것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단련하고 절제한 결과를 의로운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정의를 이룬 사람이 바로 세상에서 이긴 자가 상전이 되고 권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궤계인 것입니다. 이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육신이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켜 의로워지려는 사람의 생각은 자기 선악의 기준(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얻은)으로 볼 때 육신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의로워지려면 육신으로 율법(돌)을 지켜야(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상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육신의 능력이 강할수록 의롭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하 만물의 영광을 얻을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깁니다. 그렇게 유혹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궤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바울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우리의 씨름인 것입니다. 즉 육신에 대한 관점,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이 어떤 의를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삼고 살 것인가에 대한 씨름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의 삶을 하나님의 의를 담는 것에 순종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앞서 길게 설명한 세상의 가치를 좇는 것에 순종하며 살 것인지에 대한 갈등을 육신으로 이겨내는 씨름이 바로 이 싸움, 이 씨름의 정의이고 싸움의 대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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