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성도들에게 있기를 간구한 다음에 그 충만함이 어떻게 삶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이후가 주로 그런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라는 말씀 하나면 아마 그리스도인의 삶을 아우르는 말씀이 될 것이다 싶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살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이것에 대하여는 이 바울 사도의 권면을 성경에서 보고 ‘그렇게 살아야지!’라고 마음을 먹고 신념과 의지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율법적인 삶이라고 이미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그렇게 나타난다는 말씀이지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 성경의 방향성입니다. 생명이 있어 그 본성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께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한 이후에 몸도 하나고, 성령도 하나며, 주도 한 분이시며, 믿음도 세례도 다 하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과 성령 또 주님과 세례와 같은 것은 언뜻 하나라고 하는 것에 이상할 것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겸손인양 늘 말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바울 사도가 열거한 것들은 하나가 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쉽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도 그렇습니다. 세례다 침례다 갈라진 것이 그렇습니다. 믿음이 같다면 종파가 달라질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 다툼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 다툼이 있다는 것은 사실 온전한 믿음이 그 교회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에 대한 개념과 정의가 다르다면 그 종교계 전체가 하나의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뭐라고 미사어구를 붙여도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가 여러 가지가 하나라고 선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르심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 안에서 모두가 하나의 목적과 의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이 하나고, 그것이 하나님 그 부르심도 하나며, 그 부르심이 하나니 사람들이 그 부르심 안에서 가진 소망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있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알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사람이 나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한 다음에 그 인지된 삶의 세계 안에서 어떻게, 또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를 생각하고 바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소망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육신의 정욕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분명히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 법 아래 있기 때문에 사람도 목적 없이 어떤 것도 만들지 않습니다. 목적이 있으면 그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지능을 가진 동물이 사람이지, 목적도 없이 무엇인가를 하는 존재가 아닌 것은 사람이 목적 아래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가장 먼저 자아를 인식했을 때 자신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알고자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소망입니다.


사람이 그 소망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이 하나이기 때문에 삶에서 인지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제 아무리 성경을 달달 외우고 성경의 배경이 되는 시대적 상황이나 원어를 꿰뚫고 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세례가 여러 가지가 되고, 교단이 여러 가지가 된 것이 성경을 공부한 자들에 의하여 비롯된 일이라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성경을 공부하지 않아 여러 종파로 갈리고 세례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공부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생의 존재 목적을 몰라서 그런 꼴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을 안다면 공부하지 않아도 하나님도 믿음도 세례도 또 우리 몸과 성령도 또 그리스도도 하나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몸도 바울 사도가 열거한 하나님, 주, 성령과 하나라는 것은 아주 주목해야 하는 것이지만 이것에 자신을 가지는 것은 아주 어려운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자나?”라는 것이 겸손의 미덕이라 여기는 신앙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도 주도 성령도 믿음도 세례도 믿음도 하나며 특히 몸도 하나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은 모두 사람들에게만 유효한 것입니다. 개와 같은 짐승이나 돌과 같은 자연은 이것에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세례를 받거나 순종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직 사람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것이라는 것은 앞서 설명한 소망을 인함입니다. 사람이 가져야할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시고 육신 가진 삶을 주신 이유와 목적을 알고 그것에 속하는 것입니다. 목적을 알면 그것에 순종하는 것은 어쩌면 어려운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그 하나 밖에 없는 뜻 안으로 들어와서 보면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그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환히 보이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충만을 간구하고서 그 간구함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과 성령과 주와 믿음과 세례가 모두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육신의 가진 자신의 삶이 하나가 되면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셨고, 그 뜻을 표현하시려고 육신 가진 인생을 창조하셨으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보내셔서 성령께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보이시고, 그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삶이 목적 밖에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세례의 과정을 거쳐 그 육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말씀이 생명이 되게 하시고, 그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이 가진 본성이 그리스도의 충만을 향하여 날마다 성장하게 되고, 그 성장함이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주도 성령도 믿음도 세계도 모두가 하나인 것은 몸 가진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서 이 인생을 주신 목적과 하나가 되는 그 소망에 이르면 모든 것이 열리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것이 창세기로 보면 하나님의 태초가 시작된 것이고, 요한 사도의 말씀으로 태초부터 있는 말씀이 함께 한 것이고, 바울 사도의 말씀으로 보면 예정하신 부르심 안에 들어가서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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