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의 성도를 향한 간구는 그리스도의 지혜와 사랑이 충만하게 되고 그 안에서 능력대로 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능히 주시는 분께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선언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 말 가운데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능히 주시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앞선 글에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졌는데 뭣 하러 구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관점을 가진 사람은 신앙이 구원에서 끝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이라는 것이 전혀 새롭거나 어렵지 않습니다. 사람이 나면서부터 사람 의로서의 삶이 시작되고 더 사람답게 살려고 많은 것을 구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을 믿는 세계에 의문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올무인 것이 분명합니다. 좀 과한 비판일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신학이라는 것이 그 위에 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아직도 모르니 공부하고 있는 것이고, 아직도 모른다는 것은 의문에 속했다는 것이니 신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구원도 거듭남도 없는 사람들인 것이 명확한 것입니다.


특히 사람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 정체성이 나타납니다. 몇 번의 글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 그것이 자기 삶으로 나타나는 세계로 자신이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아니 그것은 생명의 본성이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로 난 사람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기에 성경에서 하나님을 생명의 주관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바울 사도의 이 간구를 보면 능히 이루어 주신다고 하는 성도들의 간구와 생각이 무엇인지 분명해 집니다. 그것은 적어도 입사시험이나, 사업의 성공 혹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것을 기도하면 얻는다고 가르치고, 기도한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감동하실 수 있도록 성경을 잘 지켜 행하고 언행을 선하게 하라고 가르치고 따르는 것 역시 바울 사도가 언급한 간구하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서 능히 들어 주신다는 간구와 생각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서의 충만입니다. 거듭난 사람으로서 거듭난 생명으로 살아가고 싶은 소망에 사로잡힌 그 소망에서 비롯된 간구와 생각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과 같이 육신의 평안이 아니라 자기 선악의 기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주장하는 법 앞에 죄인이 되어 육신으로 사람을 섬기고 죄인이 되는 것을 위하여 간구하고 생각하는 것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도 역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 그 자리로 가는 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말씀, 처음 육신이 되게 했던 그 말씀이요 하나님의 의며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시는 데로 가시는 것을 간구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육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간구가 아니라 육신이 어떠하든 육신은 하나님의 성품과 의와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신 것이니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육신이 십자가에 드려지는 것을 간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하실 때 이루어졌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신 간구와 생각은 어떻게 하면 육신으로 살 동안 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 나타내며, 한 번이라도 육신을 섬기듯 더 움직여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것인지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념이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본성,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리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 삶의 어떠함을 압니다. 사람이 스스로가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듯,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본성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끄는 자기 삶을 봅니다. 밖에서 책을 보거나 산에 가서 기도해서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은 살 동안 항상 사람이듯,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고, 언제나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기에 항상 하나님께서 시뻐하시는 존재인 것입니다. 자녀가 어디 있든 부모의 기쁨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복음을 표현하고 전하는 것을 위하여 사용하려 합니다. 이것은 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그렇게 되는 세계입니다. 흔히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 같이 사람이 나태해지려 하는데 스스로 깨고 각성해서 그런 삶을 살려는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는 것과는 전혀 반대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서 살까 해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선지자가 “다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 갈 것”이라고 하신 것 또한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처럼 살려고 원하지만 잘 안 된다고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버리려 해도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본성이 이끄는 간구와 생각은 언제나 충만하고 항상 넘치게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아보십시오.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의가 보이고 느껴질 것입니다. 그것은 연구하고 찾는 것이 아닙니다. 무심한 듯 살아도 생각이 장성해지고 의문이 가만히 있어도 풀리는 세계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께 영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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