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가 하늘에 속한 족속은 물론 땅에 속한 족속들까지 하나님의 어떠함이 충만하기를 바라는 것은 정말로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없는 사람이 가지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구해야 하는데, 바울 사도는 오히려 복음을 가지고 전하는 사도인데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간구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 하실 때 세상에 없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더 가진 사람은 이상하게 가지지 못한 사람 위에 서려하고 그렇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동영상 강의를 들어보면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단지 그 분야에 대하여 배움이 필요하지 실제로는 강사보다 더 성공한 사람도 적지 않지만 강의를 듣다보면 강사는 어느새 반말을 하고 있고, 농담이랍시고 수강생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 체질화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세상의 가치관은 더 가진 자가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정상이고, 모든 분야에서 그렇게 되려고 합니다. 애굽의 피라미드가 그것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에게 자신의 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피조물과 같은 육신이 되어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한 하나님 아들의 기준에 반한다고 하여 죄인이 되어 달리심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것을 보이셨습니다. 의로운 분이 불의한 자를 위하여 오히려 불의한 자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속한 이들에게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땅에 속한 이들에게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입니다. 의지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지신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그렇게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생명의 법과 그 생명이 가진 본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성경을 기록한 모든 사도들이 가진 본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들의 표현들이 모두 생명의 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 한다는 것이나, ‘성령의 열매’와 같이 표현하는 것이 다 그 이유입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에서도 마음에서부터 충만해지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충만이 생명의 법에 의하여 충만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엡 3:16-18)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고 하심에서 영광(doxa)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타나다’ ‘표현하(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령으로 잉태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께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없던 것이 나타나는 것 그것이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세상에 없었는데 그것이 나타나는 그 자체가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광을 상대적 우위라는 개념에서 생각합니다. 1등이 2등보다 영광스럽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그 자체가 나타나면 그것 이상의 어떤 영광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는 것은 그 자체가 영광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각과 안목과 가치라는 세계 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뜻이 없다가 나타나면 그것이 바로 영광인 것입니다. 아우라 눈부신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의 의와 뜻을 순종하여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아주 여러 번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세상이 존재하게 되는 순간 나타나신바 되었고,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것을 몸소 보이시고 그것을 전하신 것을 보고 십자가가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순종하는 그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심령 안에 들어오시고 성령께서 그것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 생명의 본성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순종한 믿음을 인하여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안에 거하게 되면 그것이 생명이 되어 본성이 되면 그 보다 강하고 굳게 자리하게 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생명체는 약해보이지만 그 안에 있는 본성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강함입니다. 이것을 사람이 흙으로 지어짐을 인하여 뿌리 내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은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본성은 생명의 법을 따르기에 언제나 속에서 밖으로 자라고 충만해집니다. 그리고 그 본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좇아 살 뿐인데 그 삶을 보니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들의 의 앞에서 종이 되고 심지어 죄인이 되어 섬기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강해서 뿌리가 굳건히 선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본성은 생명이 속에서부터 자라듯 날마다 자라고 풍성해지며 그 본성으로 충만해지는 것임을 바울 사도가 겪었기에 성도들도 그렇게 되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종이 되는 것은 비참해보이기까지 할 것인데 바울 사도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타나는 영광스러운 것이므로 너무 좋은 것이기에 성도들도 그렇게 되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시니 하나님 아들임이 드러난 것이 그것입니다.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의 성품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어떤 행동을 보고 아버지 닮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이렇듯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 보인 십자가의 삶을 보고 자신도 그 모습이 자기 운명임을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면 그 순종하고 받아들인 것을 성령께서 잉태케 하시므로 생명이 되어 그 본성을 좇아 날마다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하늘에 속한 백성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곧 영적 이방인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모양은 비록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어리석고 비참한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십자가의 삶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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