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가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면 나타날 일들을 말씀하는 중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를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하게 하기 위하여 세우셨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이 교회라는 것을 압니다. 사도와 선지자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같이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사도와 선지자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같은 이들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충만이 있고, 또 속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점점 장성하여짐에 따라 살다보니 교회가 세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사람과 함께 목사가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목사’라는 단어는 여기 한 번 나옵니다. 빈도나 순서는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가 교회의 설립 요건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나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있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봉사는 당번을 정하고 교리나 목사에 대한 규정을 정해서 주기적으로 심방하고 설교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해석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렇게 해석했기에 오늘날과 같은 교회 시스템이 생성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1장 마지막 부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교회는 법과 같이 교리를 정하고 그것에 따라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교회가 되는 것이 온전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은 봉사가 본성인 사람들입니다. 자기 일 바빠서 봉사에 나오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순번을 정하고, 또 못나오게 되면 자발적으로 헌금으로 대치하거나 심지어 벌금을 부과하는 것과 같은 제도에 종속된 봉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조치를 취해 놓거나, 오지 않으면 비난하거나, 아니면 천국에서 상급을 받을 수 없다는 협박을 해야 하는 그런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하려하지 않아도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인하여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자기 이익을 좀 챙기고, 자기 사업을 우선시해보려고 해도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어 십자가에 끌려가시거나 내려오시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이 그것을 감당하게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육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품을 표현하신 자리를 보니 십자가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분이니 더 이상 온전하고 의로운 분이 없는데, 그 분이 세상의 의에 의하여 끌려가서 매맞고 십자가에 달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이니 십자가에 끌려갔더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바로 십자가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것이 의인이 죄인들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것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있어 한 사람이 육신으로 일하고 다른 한 사람이 말만 하고 있다면 누가 의를 가진 자입니까? 그것은 당연히 말만하고 있는 자가 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같은 일을 하는데 몸을 쓰거나 육신의 기능을 쓴다는 것은 종과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의만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은 자신이 가진 선악의 기준에 선 의로움입니다.


봉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남들과 달리 몸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오직 하나님께서 인생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신 의가 육신으로 자기 선악에 빠진 인생들의 의로움 앞에 죄인 되는 것이었기에 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고 나타나려하니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이 있는 사람, 그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자기 생명이 되어 날일 갈수록 그 생명이 자라서 자기 육신을 자꾸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선악의 기준으로 만든 의로움 앞에서 육신을 수고하고 섬기는 자리로 끌려가게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인생 자체가 봉사입니다. 자신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세상을 살아도 그만일 텐데 그리스도의 본성이 그렇게 두지 않습니다. 어린 남자아이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삶을 이끌고 원치 않는 곳으로 자꾸 끌고 갑니다. 자신은 눈 뻔히 뜨고서 자신이 그렇게 끌려가는 것을 보기만 할 뿐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본성이란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까, 목사니까, 이래야 천국 가서 복 받으니까, 이렇게 해야 사업이 잘 되고 아프지 않을 것이니까?”와 같은 이유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묵상이란 이름으로 신념과 의지를 북돋우며 가는 것과는 단 1도 같은 것이 없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되는 세계가 아니라, 신분이 목사라서, 자신이 교회 다니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제어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것도 알 것입니다. 그럼 자신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음을 고백할 것입니다. 신앙은 사실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을 좇고 자기 선악의 기준을 좇아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있음에도 그들의 요구에 자신의 육신을 내어주는 본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본성이 장성하여 충만하게 된 사람이 바로 사도요, 선지자요, 복음 전하는 자요, 목사요, 교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충만한 사람들의 본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요구하는 것 앞에 자신의 육신을 드려 수고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서로 모여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자들 앞에서도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 있으면 그곳은 봉사가 넘쳐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악인을 위해서도 죄인과 종이 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봉사 당번이 웬 말이고, 순서와 법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관리는 왜 필요하겠습니까? 봉사 당번? 그런 것 있다면 일단 교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 순저? 그런 것이 있다면, 설교에 자격이 있다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충만한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누구의 말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고 생명이 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말씀 외에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이고, 그렇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들이 모였으니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고 그것이 그리스도 충만하고 장성한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또 바울 사도의 간구가 이루어진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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