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에 들어가면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이방인을 위하여 사도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리스도의 일로 갇혀 있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가 옥중에서 쓴 편지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자체로만 보면 바울 사도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 즉 사도로서의 영역이 한정된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당시 베드로와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담당하였습니다. 요한 사도의 경우 복음을 전하러 다니기보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도들 각자의 사명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울 사도는 이방인, 제자들은 유대인’으로 사도들의 사명을 한정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2장에서 언급한 것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방인의 기준은 육신의 어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생명이 되지 않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 곧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도들은 다 영적 이방인을 위한 사도들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논조를 이 말씀과 접목을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소한 괴변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십자가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이방을 위하여 갇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로서 그것을 전하고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시고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출근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존재하는 한 그것을 나타내게 되는 본성 그것으로 인한 모든 행위와 나타남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인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 그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고, 천지창조의 때에 사람을 만드시고 안식하셨다고 하심에서 보듯 그리스도의 성품이 자신의 생명이 된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에게서 안식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의가 나오게까지 역사하시는 그 역사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일은 먹고 살려면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봐도 교회 안에서 ‘그러면 안 돼!’라는 것이나 ‘이렇게 해야 복 받는다 혹은 천국에서 상급이 크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노동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을 설명하려고만 하면 이 시대의 신앙이 얼마나 부정한 것인지 그것을 말하지 않기 너무나 힘들 지경입니다.


이 일은 하지 않는다고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으면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남자로 난 사람은 남자로 사는 일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여자로 난 사람 또한 여자로 사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여자로 나서 여자로 사는 것은 여자라는 본성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도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로 난 사람은 그리스도로 사는 일을 그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거듭난 삶을 사는 사람만 체휼하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니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갇히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속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구속은 한 편으로는 생명의 구속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났기에 그 본성에 구속되어 그것을 벗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생명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이 생명의 구속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가졌기에 대접받고 귀하게 여겨질 것 같은데 그 생명의 본성은 어이없게도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것이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인한 것이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외침이 그것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힘을 내시고 신념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해도 원래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 그 생명의 본성이 그렇게 이끄는 것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법이고, 그리스도의 본성이 생명인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성은 아주 존귀한 것인데 그 존귀함은 세상의 가치와 같이 귀한 것이 대접을 받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아는 존재인데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이 되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그런 존귀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귀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귀하게 대접해야 한다며 강대상 위에 올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것을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성 그것은 너무 귀한 것이고 세상에 비교할 것도 없는 귀함이지만 세상의 가치관대로 귀한 것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 귀한 것이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다른 것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유일한 이름 곧 정체성이고 가치인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본성에 의한 것이기에 신념을 가지고 하는 것이나 천국가면 고래등 같은 집이라는 보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그 의가 자기 생명이 되었기에 그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본성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귀한 것을 가졌기에 대접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귀한 것이 대접 받지만 그리스도의 일은 귀하기에 종이 되는 세상에 없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것만을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 의하여 갇히고 죄인이 되지만 그것을 인하여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밀인 것입니다.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이방인을 위하여 갇혔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이방인이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들이고, 그렇게 세상의 가치를 좇는 이들에게 세상에 없는 그리스도의 가치를 보이는데 그것이 세상과 다르게 종이 되고 갇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본성에 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십자가의 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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