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 영광스러운 일이 되려면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들 중에서 이루어 내었을 때입니다. 가장 흔한 예로 연예인들이나 운동선수가 상을 받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세계는 그 상을 받는 것이 영광이라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가치관에 따라 영광된 일을 정의하는 것은 어쩌면 자유지만 하나님 영광의 기준이 자신들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착각 이상의 오만입니다.


이러한 오만함은 우리가 오늘날 교회로 알고 있는 대부분의 종교 단체의 근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영광과 동일하게 일반화한 프레임이 교회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영광스러운 것을 하나님께서도 영광으로 여기신다고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자기 맘대로 다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우상이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영광은 분명히 기준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영광으로 여길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영광스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수상의 영예를 얻으려면 수상을 해야 하고, 수상은 상을 주는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 기준은 육신의 수고와 공로에 대한 평가가 본질인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영광은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도 분명히 명확한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기는 일들은 상대적 영광이 대부분입니다. 서로 경쟁하여 얻는 것이 대부분이란 의미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수상자는 한정되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이는 그 경합에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떨어진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경합에서 이긴 자를 영광으로 여기신다면 그 낙오자는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수고와 공로가 영광을 얻는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께서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기를 기도한다고 한 것을 바로 알려면 이와 같이 영광에 대한 가치관의 교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이 교정이지 생명이 바뀌어야 되는 것이므로 실은 거듭나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 생각하고 추구하며 이루었을 때 고백하는 사람들은 거듭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세상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사람들이 수상의 트로피와 꽃다발을 들고서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면 세상에서 철저히 패한 패배자로요 사형수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도무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광의 기준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보이시려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신앙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세상에서 실패한 예수님께 기도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모순인지 조차 모르는 눈 먼 자들임을 알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기도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음의 눈을 밝히시므로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려면 하나님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실 때 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전제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하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예정하심의 부르심을 받은,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하게 된 성도라는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라고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예정하신 목적이 자신의 정체성이 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기업과 그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경쟁 구도와 그 구도에서 성공한 것을 상급으로 여기는 기준에 의한 수상을 하나님이 영광으로 여기신다고 여기는 것이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서 성공하므로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교회로 와서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 기준에 순종된 자들이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기업에 속한 자도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자들도 아니며 실은 거듭나지도 못한 사망에 거하는 사람일 뿐인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며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우승한 것을 영광으로 여기기도 하는 것은 올림픽 정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듯, 하나님의 영광도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타날 때에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의와 뜻이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의와 뜻을 나타내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육신 가진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므로 우리가 그것을 나타내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에 앞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기도하신 것이며, 그 영광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 이름으로 세상이 영광으로 여기는 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광이라는 말의 근원적인 뜻도 ‘나타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기업 안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생 창조 목적을 하나님이 주신 육신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표준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와 뜻을 나타내는 것에 소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기준으로 상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같은 것은 거듭나지 못한 자들의 잠꼬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이신 그 뜻,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요, 존재 목적이요, 자신의 일이요 기업임을 아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계시고 주실 때만 아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는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있어 그 영이 이끄는 본능 안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며, 그 영이 생명으로 잉태케 하는 그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의 존재 목적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빈틈 없이 잘 꿰어져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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