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존재라도 존재하는 것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존재의 목적입니다. 존재하는 목적을 알면 그 용도와 행위와 의로움과 선과 악이 다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의 목적은 그 존재의 기업이며 능력이기도 합니다. 칼이 존재하는 목적은 자르는 것이기에 자르는 것은 칼의 기업이고, 능력이며, 칼에게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살면서 궁리할 뿐 아니라 심지어 서로 죽이는 투쟁을 하면서 얻고자 하고 알고자 하는 것은 어이없게도 존재의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하고 난 다음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한 상태에서 스스로 정의내린 인생의 목적을 좇고 있습니다. 자식을 위한 삶이나, 예술이나 자신이 하고 있는 과업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 여기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인생으로 존재하는 목적을 모른 체 인생으로 존재하는 것을 인식한 후에 스스로 설정한 인생의 목적을 좇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예정하셨다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존재하게 된 이유를 예정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인생이 존재하고서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된 다음에 있을 것을 본질로 보고 주목하다보니 그 세계가 어떻게 예정되었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운명론적 예정론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도 소망도 모두 그렇습니다. 존재하게 된 목적을 알면 그 목적을 이루는 것을 소망할 것이고, 존재하는 목적을 알면 그 목적대로 살 수밖에 없는 그것이 자신의 기업이요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것을 알 게 되는 것인데 그 하나를 몰라서 모두들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능력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특정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물건은 그 목적 안에서는 다른 목적을 가진 존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쁘게 만들어진 유리컵은 비록 못을 박거나 공놀이하듯 던지거나 할 수는 없지만 좋은 음료를 담아 놓으면 심지어 감탄을 자아내게도 합니다. 이와는 반대지만 망치는 못을 박는 목적으로 존재하기에 못이 잘 박히는 것으로 또 감탄을 자아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능력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그 존재 목적의 세계 안에서 발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육신의 능력이 물리적으로 강하거나 기능적으로 월등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연약하게 지어진 것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흔히 말하는 초능력의 세계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해서 병을 낫게 하거나, 오래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나,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것은 우리 육신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대하셨다면 그런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실 분이 아닙니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보일 수 있는 능력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연약하기에 소비되고 사용될 때 쉽게 상하는 우리 육신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허물어지는 것으로서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시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상하지도 않고 초능력으로 내려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께 그것을 능력이라며 보여 달라고 하고 또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간혹 간헐적으로 그런 능력을 나타내거나 보이는 사람이나 상황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라고 여깁니다. 심지어 그런 능력에 의지하려고 기도원에 가서 헌금으로 채색된 비용을 지불하기까지 합니다. 또 기도원까지 가지 않아도 교회에서 부흥회라도 하면 역시 돈을 지불해가면서까지 그 능력을 맛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그 능력이 나타나는 존재, 또 그 능력을 나타내는 존재의 목적 안에 있습니다. 사람에게 초인적인 것을 목적하셨다면 분명히 사람을 하늘을 날고 바다 속을 맘대로 다니면 죽지도 않게 만드셨을 것입니다. 이런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을 사는 기초 상식, 논리적 상식조차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힘은 오직 뜻하신 대로 사용하시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능력을 나타내실 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과 의와 뜻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것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우리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들이 무엇인지, 어떤 존재인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란 그 아버지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이기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신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이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 안으로 부르시는 것이고, 인생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육신이 아무리 멀쩡해도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은 모르고 자신을 인지한 후에 스스로 설정한 인생을 목적을 좇아 사는 사람은 열심히 살아도 생명이 없고 죽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관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 안으로 부르신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목적의 관점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 생명이 있는 자리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올바른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 안에 사람이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으로 표현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심령에서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생명이 되었고, 그것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 의가 성전의 양식으로 표현되듯 우리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인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육신으로 표현되는 하나님 의의 총화가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즉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는 것은 육신이 세상의 죄가 주장하는 것을 인하여 종이 되고 죄인이 되어 제물이 된다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초능력으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 능력이 무엇이라도 오직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으로 회복되는 것을 위하여 사용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목적을 나타내는 것에 필요하다면 나사로와 같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지만 그 궁극의 모습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예정하신 창조의 목적,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게 하시는 것, 그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렇지 않는 사망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생명의 자리로 옮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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