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죽음...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9. 26. 10:01 Writer : 김홍덕

어제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우리 작은 아이반의 아이가 성적을 비관해서 학교에서 뛰어내렸는데 끝내 목숨을 건지지 못한 사건이 있었다. 그 아이는 최근 모의고사에서 반에서 1등을 했고, 반 아이들과 두루 친하게 지낸 착한 아이라고 아들이 말했다.


뉴스에 나기를 비염으로 힘들고 성적을 비관해서 그랬다고 났는데, 공부를 잘하고 싶은데 늘 몸이 안 따라 주어서 힘들었던 같다. 아들에게 물어보니 비염으로 힘들어했다고 한다. 또 담임선생님도 처음 담임을 맡은 젊은 교사고, 학기 초 원래 담임이 병가를 내는 바람에 대신해서 맡게 된 반인데, 이래저래 안타까운 일이다.


그 아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어제는 내내 '그 아이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부질없는 생각이고, '좀 더 살지, 부모님은 어쩌라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마음만 무거울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일 뿐이었다.


군에 있을 때 가끔씩 부대원들의 자살 소식을 들었었다. 2,000명도 안 되는 부대인데 거의 1년에 1명 정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병사들끼리 밥 먹으면서 '이 군 생활도 못 견디면 어차피 사회에서도 살기 힘드니 잘 죽었다.'라고 몹쓸 소리들을 했던 기억이 난다. 철이 없다는 것이 그런 것인가 보다.


죽음! 참 안타깝다. 자살도 웬만하면 다 타살이다. 어제 죽은 그 아이도 사회가 죽인 것이다. 이 사회가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다.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지만, <전교조>라는 것이 생긴 이후에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더 나아졌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의 인권을 외치면서 그런 것에 힘쓰는 자신들의 정당성과 우월성 그리고 자부심을 가지기 위하여 교사가 아이들을 가끔은 때려서라도 바르게 교육하고자 하는 것을 원천 봉쇄해버린 집단이 전교조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제 그 아이가 있는 학교, 우리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도 전교조 교사들이 있는데, 그렇게 사회를 시끄럽게 할 정도로 교육을 위한다면서 아이들의 아픔을 보살피지 못했다 싶어서 한편으로 화가 나기도 한다. 물론 그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간 사회의 책임이 전교조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 전교조가 생긴 이후 학교 폭력, 왕따, 학생들의 자살이 늘어난 것 같은 느낌에 한 소리 해 본다.


궁극적으로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 세대의 건전한 사회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수능>을 없애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하여 온 나라가 들썩이는 그것이 사람 사는 사회에서 중요한 일이 되었다는 것이 안타깝고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어서다.


뭐 멍청한 사회 평론은 그만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본다. 한 달 여 전, 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같이 놀던 친구가 암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며칠을 그 생각이 맴돌았는데, 이제 또 그런 생각이 든다. 이건 분명히 나이의 탓인가 보다.


나이가 들면서 <죽음>에 대해서 아무래도 많이 생각해 본다. 점점 뻣뻣해지는 몸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삶의 너머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 젊을 때는 죽음보다 죽어가는 과정의 고통이 두려웠기도 했었다.


죽음은 결국 형식의 틀을 벗는 것이다. 살면서 생각으로 늘 꿈꾸었듯 몸에 구속을 받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신앙으로 본다면 내용이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으로>는 품속이나 건물 안으로 와는 다른 개념이다. 그건 <세계 안으로>를 말한다.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을 몸 가진 사림의 인생을 통하여 표현하는 것을 마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흔히들 말하는 창조주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믿는다. 이건 어쩌면 사람에게 축복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그럴만한 사람이라야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형식을 벗고 내용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형식 안에 있던 내용과 들어가는 세계의 내용이 같아야 하는 것이라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는 것은 만드신 이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훈련하고 2군에서 또한 연습장에서 연습하는 신분이 아니었는데 어느 날 1군 경기를 하는 법이 없듯,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죽어서 들어갈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 적이 없는데, 육신이라는 형식을 벗는다고 그 안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린 아이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은, 많은 세월 육신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만나고(그 아이는 신앙이 없다고 했다)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을 맘껏 표현할 기회가 많았다는 것, 그것이다. 


그런 마음에 삶이 허락되는 동안 더 많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 알리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도 먹어본다. 이 안타까움이 그렇게라도 승화되면 그렇게 먼저 죽어가는 이들의 혼이 교훈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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