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과 어른이 된다는 것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9. 16. 08:16 Writer : 김홍덕

고 3 수험생 아들이 대학 수시진학 원서를 쓰는 기간이다. 나의 사회경험으로는 좋은 결과를 담보할 수 없는 진로를 꿈꾸는 아들, 하지만 꿈을 이루기에 그리 좋은 방법을 선택하지 않은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인 나.


원서를 쓸 때가 되어서야 진학 대학 결정에 영향을 주는 시험응시 방식을 자기 맘대로 선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뭐 그게 아니라도 아주 좋은 학교를 갈 수 있는 성적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독단적인 결단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어서 어제 밤에 이야기를 했다.


신념을 이루는 것은 너의 삶과 연관된 사람들의 생각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단 있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신념을 함께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라고, 또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른의 의견과 독립된 의사 결정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과 대화와 설득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몽주>가 <정도전>을 죽이려 할 때, 정도전이 그것을 받아들이던 장면을 이야기 했다. 그 드라마 안에서 <정도전>은 이렇게 말한다.(일치하진 않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음 세대, 그 세대가 안되면 또 다음 세대에 분명이 그런 나라가 올 것이다.


정말로 신념은 그런 것이다. 정말로 자신의 신념이 맞다면 당대에 이루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세대와 자신의 삶에서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자신은 현실은 무시하며 산 방랑자 같이 되는 희생도 자신의 것으로 감수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신념을 가진 삶이다.


초한지에 나오는 <한신>의 예에서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의 가랑이 밑을 기면서 때를 기다린 것과, 그렇게 이룬 삶이 왕비의 모함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유방>과 자신의 차이를 인정하며 얼마든지 자신의 힘으로 그 상황을 바꿀 수 있었지만 수용하는 그 모습, 그게 신념의 단면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러하셨다. 그 분의 능력, 바다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신 능력으르 가지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보여주시고자 한 것은 물리적 기적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사람이 변하는 기적을 보여주시고자 하셨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우리가 단 한번 사는 이 삶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루면 성공한 것 같지만, 그건 아이의 생각이다. 정말로 옳다고 생각하는 삶은, 행여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를 맞나 이루지 못한 아쉬움도 이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까지 수용할 수 있는 것이 포함되었을 때 진실된 것이다.


더러 신앙인들이 신앙의 중요성에 매몰되어, 사람의 중요성은 멀리하고 신앙의 순수성 만을 강조하는 것은 신앙을 반만 아는 것이다. 이는 동생이 강간 당했다고 한 부족을 말살한 레위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한 방법이긴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의 방식은 아니다.


신념과 어른이 된다는 것은 연결되어 있다. 결국은 바다 속에 사는 고기가 짜지 않는 것과 같이 신념을 지키는 것이다. 세상이 이해하지 않는다고 바닷물의 소금을 축출하거나 바닷물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듯,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신념이 무익하고,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어른과의 독립이 아니라 용납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더불어 아직은 어리지만 아들이 이것을 깨달으면 더 좋겠다.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폰 껍데기 벗기기  (0) 2014.09.26
안타까운 죽음...  (0) 2014.09.26
신앙의 순도  (0) 2014.09.01
내용과 형식의 방향성으로 보는 생명  (0) 2014.08.24
내용과 형식  (0) 2014.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