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성장과 교훈, 그리고 안다는 것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5. 29. 17:17 Writer : 김홍덕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또 그 뜻하시는 바가 어떤 것인지 알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한 면이 아닌가 싶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신앙이라는 것을 삶의 한 부분 혹은 그 이상으로 알고 살면서 늘 가졌던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이 끝은 어디란 말인가?"> 하는 것이었다.


교리에 매몰된 신앙 안에서 보면 마치 구원이 신앙의 종착점인 것 같이 가르치고 그렇게들 살아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기독교의 신앙은 구원이라는 그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구원이 궁극의 목표가 되면 향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구원파와 같은 정신 무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삶의 전부가 되니 말이다.


이 블로그를 통해서 많이 이야기 하지만, 태초라는 것은 이 물리적인 세상이 열리는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물론 그런 시작이 있었겠지만, 21세기를 사는 사람은 그 누구도 본 바 없고, 알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늘 창세기를 대하고 공부하는 것은 오늘 나와 상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오늘 나와 상관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태초가 있어야 할 것이다. 육신적으로 본다면 태어나면서 우리는 육신의 삶을 시작하는 나의 태초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태초는 나에게 혹은 우리 중 어느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시점을 태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자기 안에 열리는 시작일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신앙의 절대적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가 한 인생의 가치관에서 시작되는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태초이고 그것이 구원인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이 옳다고 여기시는 가치관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저 하나님께서 육신의 문제를 구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인양 사는 것은 미안하지만 구원이라 할 수 없다.


여튼 이렇게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이 되었다면 그러면 그 끝은 어디란 말인가?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까지 살아가고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시험을 통과하듯 신앙의 상태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건 구원이 목표인 신앙 세계에서는 고민거리도 아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어디까지 자라야 그리스도의 분량이 되는 것일까? 만약 어떤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구원도 다 백지화 된다는 것인가? 그리고 천국에서 상급은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교회 안에 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정상적인 개념이 아닐 수 있다.


신앙이라는 것이 자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에 대하여 어떤 등급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등급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등급을 말하는 것이다. 신앙을 행여 평가해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분량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문제 그 뿐이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의 신앙이 어디까지 자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일면 답이 없다. 나는 그것에 대하여 결혼이라는 것을 가지고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사람은 어지간하면 다들 결혼을 한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것을 잘 안다. 심지어 하지 않은 사람도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결혼이다.


생각해보면 구원이나, 또 어떤 말씀 하나, 그러니까 성경의 한 말씀을 알게 된다는 것은 결혼식과 같은 것이다. 이제 구원을 알았고, 그 말씀을 결혼을 해서 결혼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도 시작이고, 말씀이 자기의 것이 되는 그 순간도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는 성경을 기록한 유대인들의 <안다>라는 개념과도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여자를 안다'는 것은 여자와 동침한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미혼자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알고 있듯, 어떤 여자의 이름이나 얼굴을 아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는 것이고, 또한 이것은 시작이다.


그러므로 구원도 그렇고 어떤 말씀을 아는 것도 그렇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것은 그 시작에서 부터 어떻게 자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결혼 부부들의 삶이 참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보는데, 그와 같이 신앙이라는 것이 어떻게 삶으로 나타나는지 또한 그렇듯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부부는 평생을 너무 사랑하면서 살아서 영화의 주제가 될 정도로 살기도 하고, 어떤 부부는 몇 일을 못 가서 이혼을 하기도 한다. 이는 결혼을 알고, 그 결혼을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것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물론 이혼이라는 것이 불가피할 수도 있겠지만, 돈이나, 외도와 같은 것은 다 결혼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보면 깨달은 바를 충실이 이행하며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삶 이외의 문제가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한 사람도 미혼자에 비해서는 분명히 결혼을 아는 사람이다. 성공적인 결혼의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지만, 분명히 그 사람들에게 결혼은 경험하고 체휼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이란 끝이 없는 것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것이다. 마치 결혼처럼. 어떤 부부는 그들의 사랑을 위하여 취미를 즐기고, 어떤 부부는 또 멀리 떨어져 살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부는 남이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애정을 과시하면서 살기도 한다.


사실 결혼이라는 제도를 유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남자라는 내용과 여자라는 형식이 만나는 것이다.  이는 성경적인 관점이기도 하다. 실제로 남자들은 명분을, 여자들은 방법과 형식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는 하나님이라는 내용이 사람이라는 형식과 결합이 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사>하는 사건의 예표이기도 하다.


신앙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라는 형식의 삶을 가지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가 되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이다. 이것은 결혼과 동일한 모양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신부로 표현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라는 의와 내용이 사람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렇듯 결혼이라는 것을 통하여 신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볼 때, 구원이라는 것도, 또 성경의 어떤 말씀을 깨닫는 것은 결혼을 하는 순간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객관적 기준에서 자람이 있고, 성장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한 것이다.


부부는 이렇게 결혼을 시작으로 그 삶과 사랑을 표현하고 누리며 산다. 이는 말씀도 신앙도 같은 것이다. 그것에는 절대적인 방법이나, 표준적인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신앙이 자란다는 것도 다 자신들의 분량의 문제이다. 그 분량 안에서 얼마나 내용이 형식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성장이고 그리스도로 자란다는 개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다 사도나 선생이겠느냐?">라고 했고, 또 몸의 비유를 통해서 다 눈이나 손이 될 수 없다고 한 것이다.(고전 12장) 그리고 이것은 또한 다른 사람의 신앙 생활을 평하고 나무라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방법이 있다면, 예수님이 사람을 제자를 꾸중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을 다 이루셨다 하심 같이, 자기의 결혼 생활, 자기가 신앙을 깨닫고 시작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고 자라는 것이다.


이는 결혼 안에 있는 부부생활이라는 생활이 모두 알지만 또한 누구나에게 비밀이듯이, 신앙도 그런 것이다. '너희 부부의 성생활이 왜 그러냐?' 하지 않음과 같이 '네 신앙이 왜 그 모양이냐?', '왜 자라지 않느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냥 자기가 교훈이 되게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구원으로 보면 구원의 시작에서 그 구원을 받은 사람을 보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고, 신앙 안에서 교훈도 그와 같이 자기의 삶을 살아갈 뿐인데 그것을 보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교훈인 것이다. 이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의 자람은 이런 것이다. 또한 교훈도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같은 내용이 삶이라는 형식으로 얼마나 잘 표현되어서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지도록 하는 삶과 과정, 그것이 자라남이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분량이 이르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 세계의 무궁함이 얼마나 끝이 없을지...... 그리고 그것이라면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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