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 생각해 보는 복음을 전하는 삶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5. 16. 10:25 Writer : 김홍덕

스승의 날이었다. 이제는 스승의 날이라는 것이 삶의 임펙나 기념일 조차 아닌 나이(?) 그리고 또한 삶의 상황이 되어 버렸는데, 그런데 스승의 날이라는 명제를 생각해 보게 된 것은 지난 날 얼마나 스승이나 선생이 되어 보려 했는지, 차마 웃지 못할 세월들이 생각이 나서일 것이다.


언제나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려는 마음으로 살았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웃기 조차 민망한 짓거리들을 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선생이 되려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의 생각이나 신앙에 대하여 굳이 비판이 아니더라도 이렇다 저렇다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 조차 "이것이 과연 잘하는 짓인가?" 생각했었다.


이런 말들을 한다. "교사는 있어도 스승은 없다"고. 스승은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네이버 사전에 되어 있다. 가르치고 인도한다는 것, 그 대상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게다.


즉 스승이라는 것은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제자들을 어떤 자리에서 이끌어 다른 자리로 가게 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스승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로운 자리로 가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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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말하는 것이 옳도다"(요 13:13)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선생이 되신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떠난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로 인도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선생이라 호칭을 받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신을 <선생>이라 또한 <주>라 칭하는 것이 옳다고 하신 자리는 우리가 흔히 <세족 의식>이라고 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던 자리에서 하셨던 말씀이었다. 선생이라는 것, 교육하고 훈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절묘한 자리가 아닐까 싶다.


사람을 훈계하고 교육하는 것에 있어 가장 저급한 방법은 <꾸중하는 것>이다. 꾸중하는 것이 독존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채찍만 있고, 당근이 없다면 그건 아무리 변명을 해도 죄인 다루는 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적어도 수레를 끄는 나귀도 채찍과 당근을 병행해서 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 그렇다.


교육이라는 것의 정의에 "피교육자 안에 있는 것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는 것도 있다고 한다. 아니 사실 그것이 가장 제대로 된 교육의 정의라고 생각이 된다. 이건 다시 말해서 스승이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교육이라는 것은 생선의 뼈를 발라내듯 그 사람 안에 있는 요소를 강제로 끄집어 내고, 보기에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꾸중하고 압박하여 제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보고, 특히 스승의 삶을 보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뼈를 발라내듯 토해 내는 것이 아니라, 육수가 우러나듯 스스로 각성하고 버릴 것 버리게 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참 스승이다. 예수님이 보실 때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부족하고 부족하며, 답답하고 답답하였을 것이지만 꾸중하시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러나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또한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모습을 보는 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또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스스로 고백하게 하신 삶은 참 스승의 삶이다.


오래 전에 스승이 되고 싶은 마음에 대중 앞에서 내가 선생이 되었다고 글을 써서 읽은 일이 있다. 참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는 정도의 일조차 되지 않는 것인데, 스승이 된다는 것, 그 의미는 모르면서 욕심만 가득할 때 그랬다. 그리고 그 마음 한번 인정 받고 싶어 안달나게 살기도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비판이나 비난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그 사람은 이래서 그렇다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내 모습에 회의를 느꼈다. 그건 그 사람을 위하는 것도 사랑도 교훈도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신앙에 관한 것이라고 달라질 건 없다. 더하면 더했지.(그렇게 위한답시고 평했던 사람들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잘 가시질 않는다.)


결국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한 그 사람이 변하고 좋은 것을 얻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란다면 꾸중도 필요는 하겠지만, 그것만 하고 싸매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스스로 깨우치고 우러나듯 각성할 수 있는 본을 보이며 살 수 없다면, 그건 다 소리 나는 꽹과리 그것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며, 또 이렇게 큰 영향력 없는 인터넷의 한 공간에서 이렇게 복음에 대하여 전해보고자 하는 나의 마음과 삶에 대하여 이렇듯 어떻게 전해가야 할 것인지를 지난 날의 무식한 과오를 돌아봄과 함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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