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먹는 것에 대한 말씀이 많다. 먹어도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대표적이다.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 한국인 숙소에 현지인 아줌마가 아이를 데리고 식모를 하고 있었다. 



먹고살기
먹고살기 by 만박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그런데 어느날 돼지고기 두루치기가 나왔다. 그래서 저 아줌마는 이슬람교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했다. 그럼 돼지고기 만지지도 못할텐데 어떻게 이렇게 요리를 했내고 물었더니, 고무장갑을 끼고 하면 용인된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유머 같지만 우리 많은 기독교인들도 이렇게 해석한다. 안식일이나, 먹는 것 같은 것들이 다 그렇다.


우리가 성경을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 사람들이 돼지고기에 대하여 해석하려고 하는 것과 같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단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한마디로 정의하면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행위에 대한 행위 규범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다.


흔히들 사람들이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라고 하지만, 신약의 말씀도 행위 규범으로 또 문자 그대로 행애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믿는다고 생각한다면 서기 3,000년에 살아도 그 사람은 구약시대를 살고 있고, 신약도 복음이 아닌 율법인 것이다.


흔히들 문학에서 행간을 읽어라는 말이 있다. 심청전이 있는데, 심청전에는 효라는 말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심청전은 효에 관한 소설이다. 저자가 읽는 사람들이 효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소설이라서 그렇다.


성경도 그렇다. 예수님께서 부모를 두고 나를 좇으라 했다고 부모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도 사람 앞에서 아버지로 나타나신 마당에 부모를 버려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부모로 부터 온 유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따르라는 말씀)


먹는 것도 마찬가지 이다. 지금이 신약 시대라고도 하는데, 지금 돼지고기를 먹지 않아야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구약시대의 신앙이고, 신약도 율법이고 행위 규범인 사람의 신앙일 뿐이다.


자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심청전을 읽고서 부모님에 대하여 효도해야겠다고 깨닫고 그렇게 살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바다에 몸을 바쳐야할까?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심청전을 기록한 목적이 그 사람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과 예수님과 동일하게 육신을 가진 인생들도 그렇게 살수 있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임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때로는 먹는 것으로, 때로는 예식과 규례로, 또 때로는 법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그런 모든 것은 성경을 기록하신 목적을 아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되는 것이고, 목적을 모르는 사람을 알때까지 그 모든 것을 문자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일조를 반드시 내어야 한다고 말하려면 돼지고기도 먹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어느 것은 문자대로 어느 것은 의미로 그렇게 맘대로 해석하면 안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안에 이루어진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든 말든 상관없지만, 성경 말씀의 목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문자적으로 또 행위로 지키는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먹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먹는 것과 먹는 사람은 같은 존재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유월절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이 되라는 것이지 실제로 피를 먹으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기 안에 없다면 포도주 먹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먹는 것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한다면, 굽이 갈라진 것은 신앙에 구분이 있다는 의미고, 되새김질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며, 지느러미는 방향성을 가진 것이며, 비늘은 세상과 같은 바닷물과 자신이 구분되어야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은 다 방향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음식을 금한다고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하나님의 성품인 그리스도의 삶이 있으면 그렇게 그 말씀을 주신 목적을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자기 안에서 발견한 사람들은 이미 자기 안에 행위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과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있고, 또한 늘 말씀을 묵상하고 있으며, 또한 늘 하나님을 향하는 방향성이 있고, 또한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다른 삶을 사는 것(요17) 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사람이 시험에 들게 된다면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의 말씀을 읽을 때,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돼지고기 먹는 것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려 하시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말씀을 주신 목적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적을 아는 사람은 그것에 대하여 자유하고,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자기가 먹고 싶다면 삼겹살을 먹어도 되고, 그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 믿는 기회를 잃을 것 같다면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이런 맥락이다. 우리에게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았다면 심청이 처럼 굳이 바다에 빠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즉 먹는 것을 가리신 하나님의 목적이 자기 안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먹는 것에 대하여 규례를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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