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30) - 노아 방주의 부정한 짐승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2. 22:13 Writer : 김홍덕

사람을 선악간에 판단하는 것은 단순하거나 분리된 명제가 아니다. 사람을 선악간에 판단하는 것은 결국은 교회의 모양 마저 바꿀 수 있다. 즉 교회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선한 것만 축출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이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이 악한 것인지 판단하는 나름의 기준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교회도 신앙에 관한 태릉 선수촌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앞에서 정의 내린 큰 교회, 즉 세상에서 성공하고 고상해질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기성 교회들의 경우, 하나님을 잘 믿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이라는 것은, 공부 잘하고, 성공하고, 부자되고, 명예를 얻을 수록 기뻐하신다고 가르친다. 한 마디로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에게 복이라는 것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사람들에게 배타적이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교회에 나오지 않고, 개독교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느낀다. 교회가 차별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 범주에 들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그 정책이라고. 그런데 그 차별성이 하나님과 같은 기준이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인생의 복이 돈과 명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엇보다, 사람을 선한 부분과 악한 부분으로 나누어 분리하고, 그것은 결국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온 관원처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 안에 짐승들을 태울 때 부정한 짐승도 태우라고 했다. 사실 하나님께서 부정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그 어떤 것도 부정한 것이 없다. 하나님은 불량을 만드시는 멍청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정한 짐승이라는 표현은 노아의 방주 때 처음 나오지만 어떤 것이 부정한 것인지에 대한 정의는 모세의 시대에 율법과 함께 확립된다.(그러므로 부정한 것은 율법을 주신 목적과 함께 해석되어야 한다.)


노아의 방주는 교회를 뜻하는데, 이 방주에 부정한 짐승을 태우라고 하신 것은 교회가 부정한 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부정함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는 사람의 눈에 부정해 보이는 것을 말한다. 교회라는 곳은 오히려 사람이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영지주의와 악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수용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사람의 기준에 부정한 것은 얼마든지 교회 안에서 안식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회라는 곳은 선악의 기준을 가진 세상 모든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죄인이고 부정한 사람들이 안식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세상의 관점에서 부정한 존재가 된 첫 번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오히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할 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악한 생각을 가르치고 강조하여,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선악 기준에 의하여 부정하게 된 사람들을 배척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선악과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보는 것은 교회의 존재 목적과 연결되어 있고, 이것은 노아의 방주에 왜 부정한 짐승이 탈 수 있는지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즉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진 사람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 그 자체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사람 안에서 사람을 볼 때 선과 악의 기준에 따라 나누는 관점을 가지지 않고, 보기엔 연약해 보이고 뭔가 고쳤으면 하는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셨던 모습이라는 것과 동일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그런 관점으로 볼 수 있도록 표본이 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므로, 사람을 사람 그대로 본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 초라한 모습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벌을 받는 모습이 아니라, 바로 나의 정체성을 보여 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구속인 것이며, 그런 관점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다면 그것이 바로 부정한 짐승이 탈 수 있었던 노아의 방주와 같은 교회가 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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