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5)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5. 6. 11:48 Writer : 김홍덕

십자가는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는 자리이다.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설명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리를 떠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설명을 하실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셨을 때는 그것을 설명하는 사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진작 필요했다면 창조 때 만드셨을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의 자리와 정체성을 설명하시려 하신 것은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하나님이 되려고 먹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사람의 자리를 떠나 하나님처럼 되려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은 자기가 벗었다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부끄러워했다는 것은 감추고 싶다는 것이고, 그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벗었다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볼 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면 이 육신은 안된다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유가 <하나님처럼 되려>했던 것이었는데, 그 기준으로 보니 벗었다는 것, 육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렸다. 이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부위를 가렸다는 것이 아니다. 육신이라는 것을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렸다는 것이다. 무화과는 성경을 기록한 유대인들에게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숫자 4를 죽을 사자로 생각하듯이, 그들에게 무화과는 율법이요, 유대인의 나무로 인식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율법으로 육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을 잡아서 그 가죽으로 옷을 해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다고 하셨다. 바로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의 예표인 것이다. 즉 무엇으로 사람이 육신이라서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릴 것인가 할 때, 어린 양의 희생으로 그것을 가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자리를 만드신 것이다. 그 십자가의 사건의 주인공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정도를 표현하기 위하여 아들을 죽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신 사람의 원래 자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이 달리신 사건이기도 하고, 또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이 회복되는 사건을 겪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보니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미운 오리 새끼가 날아가는 백조를 보고 자신이 백조인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사건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먹은 선악과에서 비롯된 십자가의 사건은 십자가를 보고 사람이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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