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4:12-19) 하나님의 뜻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6. 3. 10:08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름 성경이라는 눈에 보이는 실존이 있어 그나마 뭐라고 답이라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모호합니다. 문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킨다는 것이 마치 심청전을 읽고서 효도란 부모를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면 당연히 성경대로 사는 것도 성경에 나오는 문자대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율법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신약은 문자대로 지키면 복음이고, 구약을 문자대로 지키면 율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기록한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키려 하는 것이 바로 율법적인 것입니다. 그것대로 하면 성경을 지킨 것이고, 아니면 성경을 어긴 것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기도하러 산에 가는 것은 그나마 선한 측에 듭니다. 남에게 묻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 그 하나님의 뜻을 자기 밖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 것 같은 존재를 가늠하는 기준은 ‘신학을 했는가?’, ‘기도 많이 하는가?’, ‘신비한 능력이 있는가?’와 같은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의 정체입니다. 나의 일과 무관하게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셨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뜻을 묻는 대상조차 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찾는 것입니다. 목사를 찾는다면 더 큰 교회의 목사를 선호하고, 목사가 아니라면 세상에서 더 성공한 장로나 지위를 가진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다른 것 볼 것 없습니다. 사경회나, 부흥회 혹은 간증 집회 할 때 어떤 사람을 부르는지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뜻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근원적인 생각과 뜻이 아니라, 자기가 하려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가 궁금한 것입니다. 대학원을 가는 것과 취업 중에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을 지켜 행하는 것도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하여 자신이 기대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거래를 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자기 마음에는 이미 정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뜻대로 될 것인지 하나님의 보증을 얻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을 담보하기 위하여 성경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심청전의 예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어겨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심청전이 말하는 효심이 있으면 상황에 따라 부모를 위하여 목숨도 바칠 수 있는 것이듯,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알고 그것을 자신의 의와 생명으로 삼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오히려 어기려고 해도 어길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 밖에 있는 존재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을 이유가 없습니다. ‘어느 대학을 갈까요?’와 같은 심지어 교회 목사에게 ‘신혼여행 어디로 갈까요?’와 같은 것을 물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사람 안에 잉태되듯 내재하는 것이고, 그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생수가 배에서 흘러넘친다고 하심과 같이 자기 안에 늘 충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생을 향한 근원적인 뜻이 무엇인지만 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계획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이란 존재에게 가진 뜻만 들으려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들어 자기 생명이 되면 그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고난>은 어떤 면에서 보면 다분히 육신을 가진 삶 전반을 이야기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인생들은 기본적으로 육신을 가진 삶을 <곤고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육신이라는 한계 안에 수용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다 이루지 못하는 그 괴리가 바로 인생이 가진 곤고함의 근원입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다 되면 인생을 고난으로 여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은 이 육신이 가졌기에 겪는 곤고함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곤고함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맘대로 되지 않는 이 육신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뜻하신 바가 있기에 우리의 뜻이 아닌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는 것으로 알아 이 육신을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존재가 될 것인지를 사람이 선택하므로 그 선택에 따라 그리스도의 삶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기가 뜻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도울지 그 뜻을 알고자 하는 인생이 될 것인지 극명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고난>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과 인생의 난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육신의 수고로움 전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이야기하는 고난의 이야기이도 합니다. 도둑질이나 악행으로 고난을 받지 말라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우리 육신이 바라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가졌는지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성경의 행간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 안에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이유가 있습니다. 이 육신을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으로 소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의와 뜻과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흔히들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뜻, 곧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묻고 궁금해 하는 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신 뜻이 없기 때문에 궁금한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뜻일까 궁리하는 것도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기본적인 뜻과 의가 없기 때문에 하는 궁리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하나님의 뜻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누구에게 물어서 그 뜻을 얻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구하고 궁금해 한 하나님의 뜻이 목숨을 건 선교에 관한 것이어도 아무 소용이 없고, 하나님 앞에 뜻을 구하는 것이 아주 겸손해서 어린아이에게서 그 뜻을 발견했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며, 천 없는 신학자나 유명한 목사나 신비한 능력자에게 듣고 순종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기본은 자기 안에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유일하고 기본이며 전부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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