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단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겪는 고난이 아닙니다. 사회생활을 할 때 다른 사람들과 달리 교회에 가야하기 때문에 겪게 되는 식사기도나, 주일 성수와 같은 일로 인하여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비난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재된 육신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나타내기 위하여 세상 사람들이 높은 곳을 향하여 매진할 때에 낮은 자리로 가서 수고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름이란 자고로 그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대명사이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도 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그 정체성대로 살 때 영광을 받으시고, 기도할 때 들으신다는 의미이지, 세상에서 영광스런 일을 이루었을 때 수상 소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입으로 말하는 것이나, 기도할 때 주문처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붙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부끄러워말고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도,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서 높아지려고 혼신의 힘을 다할 때 오히려 낮아져서 종과 같이 섬기는 그것을 세상의 기준으로 낮은 자리라 여겨 부끄럽게 여길 것이 아니기에 고난에 참여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심판이라고 하면 죽어서 하나님이든 염라대왕이든 그 앞에서 살 동안의 행위에 대하여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예수님께서 오심 그 자체로 인함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롬 5:13)고 말씀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어떨 때는 심판하러 오셨다(요 9:39)고 하시고, 또 어떤 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도 심판하지 않는다(요 12:47)고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충되어 보이는 말씀들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는 예수님의 정체성, 그것이 모든 인생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사는 자들은 구원이 되고, 예수님의 정체성과 다른 이들은 심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 그 자체가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요 3:18)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이 왜 존재하는지의 목적을 십자가에서 보이심이 광야의 놋뱀과 같이 심판과 구원의 기준과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람의 정체성을 보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더 없이 의로우신데 오히려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한 유대인들의 손에 처형이 되시는 그 모습이 바로 인생이 육신을 어디에 드려야 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육신을 드리기 위하여 그 속에 어떤 것을 의로 여겨야 하는지를 보이시고,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또 듣고서 그것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본질이요 목적이며 의미라고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이 되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또 비웃는 자들 그리고 그것을 아무 의미 없게 받는 모든 자들은 그 자체로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 것은 베드로 사도의 때에 종말론이 팽배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고, 그것이 바로 심판과 구원의 기준이요 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을 전한다는 것은 곳 심판과 구원으로 나누어짐을 전하는 것과 같음을 알고 있었기에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에 대하여 인지하는 것, 아니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존재하게 된 그 순간부터 심한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실 때 이미 모든 심판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그 때에 이미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지, 사람이 가져야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그것에 다 말씀하셨기에 사람은 어느 시대를 살았더라도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었고 또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곧 심판에 관하여 이긴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집은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거하는 곳이니 당연히 그곳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구원과 심판이 나누어졌기에 하나님의 집은 구원 받은 사람들이 거하는 곳이고, 그렇게 구원을 받은 자가 있다면 당연히 심판을 받은 자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들 곧 예수님의 오심이 구원이 된 사람들과 달리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 곧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달리 높은 곳을 향하여 좇아가는 자들은 설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 좇아가는 곳이 도덕적인 자리나, 신학적인 자리나, 신앙 세계 안에서 능력 있고, 큰 교회에 시무하는 것과 같은 높은 곳도 역시 높은 곳이며, 그곳을 지향하는 자들 역시 심판을 받은 자요 구원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고 그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 가진 인생을 주신 목적대로 육신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상이 추구하는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을 향하여 가는 본성으로 사는 것에 소비하는 인생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기에 그 영혼은 하나님께 맡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의 의와 뜻과 목적과 계획대로 살고 있는 것이 조물주에게 영혼을 맡긴 것이 아니면 어떤 것이 조물주에게 영혼을 맡긴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조물주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창조자가 뜻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기에 하나님을 조물주라고 언급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바친다면서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 아닙니다. 신부가 되고 수녀가 되어 순결을 지킨다고 이야기 하는 것도 조물주께 영혼을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모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버린 <나의 하나님> 곧 자기가 하나님으로 여기는 존재에게 영혼을 맡기는 것이고, 이는 인생의 창조목적과 짝을 이루지 않는 것이기에 육신이 총각으로 처녀로 살아도 이미 다 음란한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과 짝을 이루지 않았는데 그 형식의 상태가 깨끗하다고 순결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주를 위하여 죽겠다면서 선교지로 떠나는 그런 것도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 것이 아닙니다. 주를 위하여 죽겠으니 힘든 곳으로 보내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도 더할 나위 없는 어리석음일 뿐 하나님께 영혼을 맡기는 것과는 아주 아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인생으로 보내신 뜻도 이루지 못하는 주제에 가긴 어딜 가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의 이 말씀은 결국 우리에게 하나님이 육신을 주시고 인생을 주신 뜻을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서 깨달아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심과 같이, 우리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영화로운 일이지만 그 의로움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적선하듯 하나님을 전하는 것과 같이 하지 말고 오히려 육신으로 섬기고 수고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고난이며, 그 고난에 참여한 것이 심판의 이면인 구원을 얻은 것이며, 그것이 바로 조물주, 곧 하나님께 영혼을 맡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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