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참 열심히들 삽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삶은 죽지 못해서 사는 것입니다. 삶이 긍정적일 수 있으려면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다들 목적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게 알고 보면 아주 흐릿한 것들뿐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나, 권력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 그것이 삶의 목적인 것으로 아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추구하는 것이 어느 정도가 되어야 자기 목적을 달성했는지 모릅니다. 그걸 모르니 부자는 계속 돈을 더 모으고, 권력자는 영구적인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은 다들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은 자기 육신을 덜 움직여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아주 유명하고 그럴듯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인즉슨 힘 있는 젊을 때 육신을 수고해야 나이 들어서는 육신이 평안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육신의 상태 = 인생의 가치>라고 여기는 까닭입니다. 즉 육신을 삶의 본질로 보는 것입니다. 육신을 근간으로 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가치, 정치적 이념이나 논리나 정책과 같은 것은 우선은 육신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지만 그런 것이 추구하는 바가 결국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뭔가 더해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지 육신을 가진 인생을 어디에 쓸 것인지가 아닌 것입니다. 다 젊어서 고생해서 늙어서 평안해지고자 하는 것과 같이 철학적, 정치적 가치를 통해서 결국은 육신을 가진 인생을 평안하게 하고 그 가치를 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거나 사용하는 모든 것을 존재 자체가 아닌 그것의 존재 목적을 본질로 여깁니다. 그 존재의 목적이 상실된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목적을 소진한 것은 쓰레기라고 해서 버립니다. 인생이 사용하고 인지하는 모든 것 중에서 존재 자체를 본질로 여기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삶, 그 자체뿐입니다. 육신을 가진 인생, 육신에 기인한 혈연과 각종 이념과 가치는 모두 어떤 것을 위하여 있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삶을 본질로 여기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자기 육신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평안해지는 것을 바라고, 그것을 위하여 유용하다고 검증된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육신은 유한합니다. 유한하다는 것은 소비가 된다는 것이고, 소비한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소비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 그 자체라고 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몸부림치고 있지만, 인생은 자기가 뜻하여 살게 된 것이 아니라는 그 하나의 의미만 제대로 알아도 자기가 인지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이 부여한 모든 것이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을 주셨다(롬 1:19)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적어도 인생이 자신이 뜻한 대로 육신의 삶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 하나만 바로 인식하고 인정해도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를 인정하지 않으니 자기 뜻으로 나지 않은 삶이 금수저니, 또 남자니 여자니 하면 자기 뜻으로 나지 않은 실존을 인식하면서부터 그것이 마치 자기의 의로움 인양 자기 존재를 기반으로 모든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인생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자기 좋을 대로 행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습이 선악과 사건이 전개되는 시점에서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다는 것의 단초이기도 한 것입니다. 자기가 만들지도 조성하지도 않은 인생을 자기 것이라고, 존엄하다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서 존재하게 된 자아를 바탕으로 그 자아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주장합니다. 금수저가 부자 노릇하는 것이나, 여자는 여권신장을, 동성애자(사실 동성애는 우울증과 같은 정신병의 일종)는 성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분명히 주신이가 있습니다. 진화론이 있기는 하지만 인생 자신도 존재 목적을 모르는데, 미개한 생명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화했는지 목적 없는 진화에서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고 싶은 미개함을 신봉하거나, 아니면 자신과 같이 자기 인생을 선택하여 난 것이 아닌 인생의 수도나 깨달음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자기 존재의 정체성과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는 초등적 사고가 아니라면 적어도 자기 존재를 조성하신 이가 있음을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하나님을 믿느냐 아니냐의 믿음의 기본적 근간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목적 없이는 이쑤시개 하나도 만들지 않는데 하물며 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생일까 생각할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믿음에 따라 이해가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을 도구로 여기는 사람 등으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에 대한 목적을 가지신 분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삶의 주(主)이심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도구로 여긴다는 것은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세상의 모든 가치관과 같이 육신의 평안이 하나님의 복이요, 세상의 성공이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인데 역으로 하나님을 도구로 아니 이 또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은 우리가 가진 이 육신 가진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는 것인 우리 육신의 용도와 목적은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을 위하여 소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육신을 평안케 하고 보전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고, 육신의 삶이 영광을 얻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 했다면 예수님은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권세와 부와 영화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오시지 않았던 우리의 인생도 평안해져서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돈을 벌고 권력을 얻어서 몸이 평안해지면 교회에 잘 나갈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것도 어리석음입니다. 오늘 생명을 취하시면 어떻게 할 것인지도 문제지만, 권력과 돈을 좇던 이들은 멈추지 않고, 때로 멈춘 듯 교회로 오면 교회에서 또 지시하는 자리에 가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이 육신이 더 수고하고 쇠잔할수록 하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손때 묻은 것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합니다. 손때가 묻었다고 할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사용한 것은 그 물건의 목적대로 잘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의도한 목적을 이행하기에 너무 적합하다보니 자주 사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 모습은 낡고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지만 그럴수록 더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이 평안해지고 말끔하고 좋은 지위와 많은 부로서 육신을 덜 사용하는 것에 인생의 본질이나 행복이나 만족이나 성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하나님께서 조성하실 때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image)을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즉 목적을 위한 도구요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위하여 육신을 소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육신의 소비가 육신을 가진 존재에게는 고난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려고 하면 예수님과 같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럴 이유가 세상 가치관 안에서는 전혀 없는데 이상하게 의를 가진 이가 의를 가지지 않은 존재를 위하여 육신을 소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 하나를 알지 못하면 고난도 거저 참고 견디면 육신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담보하는 과정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그런 관점이 아닙니다. 우리 육신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지,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바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는 베드로 사도의 권면은 바로 십자가의 삶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을 감당하는 것,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들의 삶은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나타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진정한 의미도 하나님의 영광도 이것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 분이면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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