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하여 교회에 다지니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저항하는 것을 고난이라고 여깁니다. 쉬운 예로 서울역 광장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 예수 믿으라고 외치고 떠들다 이를 제재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또한 고난과 시험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살인이나 도적질과 궤를 같이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4:15)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주장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긴 하였으나, 백성들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책망하거나 자극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고, 그 전한 내용에 대한 선택은 전적으로 들은 이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신 방법은 십자가에게 달리셔서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보이시므로 그것을 본 사람들이 그 이미지를 인하여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바라고, 의인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달리 죄인인 주제에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고 그것을 자랑하던 인생임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강요만하지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그 마음에서 정말 왜 믿어야 하는지 느끼게 하는 것은 보여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전하는 사람들은 듣는 이들 앞에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로서 구원을 베푸는 높은 자리에서 나눠주듯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듣는 이들보다 낮은 자리에서 그들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것 볼 것 없습니다. 교회의 강대상의 위치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하니 그들도 당연히 저항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정말로 낮은 자리에서 복음을 전한다면 저항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은 개는 발로 차지 않는다고 했듯 자기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 굳이 힘을 행사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서울역에서 외치는 소리에 저항하는 것은 그래야 하는 이유는 보여주지 않고 높은 자리에서 외치기만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이라 함은 <예수님의 이름> 곧 정체성을 인하여 받는 고난으로 낮아지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아이러니하게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본성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들 보다 낮아지고 죄인이 되므로 인하여 남들보다 육신으로 더 수고하게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되어 수고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온전히 수동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기에 강제하여 전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강권하여 채우라 했다고 끌어다 놓듯이 교회에 사람을 데려다 놓고선 전도했다고 설레발을 치는 것은 아주 저급한 코미디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강권은 믿지 않는 사람이 보고서 그 마음에 갈 수밖에 없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게 그들에게 온전한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면서 보이신 법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이름은 정체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욕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볼 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것은 미련한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인하여 오히려 종이 되는 모습이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어이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더 좋은 것을 가지는 목적이 더 높이 오르기 위한 것이고, 또 좋은 곳은 높은 곳에 있다고 여기는데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낮은 곳에 귀한 것이 있다고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보자니 어이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바로 그런 비난과 욕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욕을 먹는 것이지, 가만히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시끄럽게 예수 믿으라고 스피커로 소리치다 시끄럽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제재하는 요구를 욕먹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흥분한 것과 같은 것이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욕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이야기 하려면 먼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신학을 한 목사, 교회 안에서 유역한 자들인 장로와 같은 이들이 아니고, 그저 교회에 사람을 끌어다 앉히고 전도했다는 이들도 아니며, 방언을 하고 병든 사람들 고쳐내는 사람 역시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법으로 세상을 살 수밖에 없는 본성입니다. 따라서 그 본성을 가진 사람이어야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생명에 한하여 사용하는 개념이기에 이를 가진다는 것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본성으로 살면 성경을 어기려고 해도 어길 수 없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지켜내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은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을 복으로 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육신의 정욕이라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육신을 자해하듯 곤고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행위고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의 복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을 주신 목적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그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는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것을 하는 수고를 즐거이 하게 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육신을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소비하는 것이기에 그것에 고난이 따르는 것이고, 그 수고를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가졌는데 없는 이들보다 낮아지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이 평안해질수록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고 여기는 안목과 가치관 안에서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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