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인생을 고난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것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로 인한 곤고함 때문입니다. 당연히 원하지 않았고, 또 생각해보면 고난을 당할만한 잘못을 한 것도 없는 것 같고, 열심히 살지 않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인생은 왜 그리 곤고한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인생을 힘들어하고 또 이상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인생의 곤고함을 <연단하는 불 시험>이라고 말하면서 이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은 자신의 삶에서 겪는 각양의 곤고함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데(이것이 이상히 여기는 것) 베드로 사도는 이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고 이로 인하여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베드로전서를 이야기해가면서 언급하는 것이 이 서신의 수신자는 길 가는 나그네와 같은 불특정 다수인이 아닙니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에 따라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이들, 곧 진정한 성도들이 바로 이 편지의 수신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지만 성도가 아닌 이들은 자기 죄로 인한 고난이라고 앞서 이야기 했고, 성도들의 고난은 애매히 받는 고난이라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고난을 좀 다르게 표현해 본다면 인생을 사는 동안 받게 되는 저항과 같은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된다면 그것은 고난도 아니고 피곤하지도 않습니다. 잘라서 말한다면 인생이 곤고하고, 사람들과의 갈등을 겪게 되는 이 모든 것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이 자기 맘대로 되기만 하면 힘들 것 없고, 사람이 입 안의 혀 같이 대해준다면 갈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곤고한 것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한다는 것입니다.


이 느낌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려고 권력이나 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으면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을 전하는 것도 권력과 돈이 있으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크게 지을 리가 없고, 유력한 사람이 교회의 장로인 것을 자랑할 일도 없습니다.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으로서 겪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이유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모를까 적어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또 세상을 실수 없이 경영하시는 분으로 믿는다면 우리 삶의 모든 사건과 요소와 인식하는 모든 존재는 다 그 창조와 경영의 섭리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하는 일들을 어떻게 느끼고 정의하더라도 그 이유와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이든, 기쁨이든, 또 흔히 말하는 생사화복에 속한 모든 일, 그리고 우리가 인식하고 느끼며 만질 수 있고 밟을 수 있는 모든 것 역시 그 창조 목적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과 불 시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권면하는 것도 바로 이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義) 안에 있다는 바로 그것.


우리에게는 곤고하게 느껴지는 일들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생, 특히 우리 자신을 만드신 목적 안에 있는 것임을 아는 것, 이것이 진정한 신앙의 본질적 근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며 고난을 피할수록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지만, 인생은 제 아무리 노력해도 육신이 가진 한계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인간들과 어울려 있어 맺어진 인간관계 속의 주장들로 인하여 곤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노력한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죽기 전에는.


그런데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고, 사도들은 고난을 기쁘게 즐기라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그리고서 그들이 지금의 인생들이 하나님의 복으로 여기는 것과 같이 평안하고 세상이 부러워할 성공과 영광된 삶을 살았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하나님의 아들인데 어이없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지 않나, 그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보고 또 그 평안을 누린다는 사람들이 도망 다니고 옥에 갇히다 못해 잡혀서 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평안과 기쁨과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성경의 말씀을 부인하거나, 아니면 부인하지 않고 믿으려면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이유는 알고 가야 합니다. 이런 의문은 접어두고 어떻게 인생이 평안할까만을 고민하고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이 선택한 결정이 잘 추진되지 않는 이유만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고민의 차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속에 있는지의 유무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인지하고 겪는 모든 일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창조하시고 그 인생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살게 하신 목적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알고 순종하는 사람은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들고 경영하시는 목적을 늘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알지 못할 것이라고 하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그 생명으로 태어나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남자가 여자를 이해한다고 해도 여자로 나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말씀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생령을 불어 넣으신 것 또한 그 생령이 육신으로 표현되고자 함이지 저장하기 위함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을 사는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는 순간순간 겪는 일들에서 겪는 이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를 발견하기에 그것을 찬양하고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권능을 알게 되고, 그 순종하는 이의 삶을 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위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 <고난>이라고 말하는 일들을 우리가 겪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알고 순종하는 이들에게 육신으로 살면서 인지하고 겪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어야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인식과 순종이 있지 않으면 육신으로 인생을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을 기쁨과 영광으로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고난을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고난에 대한 보상이나, 죽은 개는 발로 차지 않듯 자신이 고난을 받을 정도의 선택을 받았기에 영광이라고 여기는 정도지만, 그런 가치관과 고난의 참여는 굳이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얼마든지 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또한 세상을 지으신 목적을 알면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서 분명히 곤고함으로 느끼는 일들의 의미와 뜻이 또한 함께 느껴지므로 그것을 인하여 우리가 이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에게나 열리는 것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만의 세계입니다. 즉 억지로 인생의 고난을 영광으로 여기려 노력하고 참고 견디는 자들, 고난을 견디면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는 일념으로 견디는 자들은 고난의 의미도, 영광의 의미도 모를 뿐 아니라 구원과 거듭남도 없는 자들로 모두 자기 죄를 인하여 인생의 곤고함을 겪는 이들입니다. 거듭나지 못했다면 삶이 아무리 선해도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삶의 모든 순간들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알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그 이름과 정체성을 나타내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알고, 인생은 단지 그것을 위하여 창조된 육신이란 형식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 뜻 안에서 사는 순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오나 신념으로 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났을 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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