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6:9-16) 완전한 지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11. 2. 06:29 Writer : 김홍덕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갈까?”라는 문장은 의문문입니다. 의문이 있다는 것은 그 지혜가 온전 혹은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의문에 대하여 명확하게 답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답변에 이어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의문이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언급하십니다. 그것은 지혜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보통 ‘완전함’이라는 것보다는 ‘온전함’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완전함이라고 하면 그 뉘앙스가 실수조차 없는 것, 곧 드러나고 표현된 것의 무결함을 뜻하고, 온전함은 표현 이전에 그 존재의 정체성의 무결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존재론적 말씀인 성경에서는 온전함을 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미가를 통해서 지혜의 완전함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는 그 앞에서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갈까?’라는 의문 혹은 질문의 연장선에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함이 표현된 어떤 결과의 무결함을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어떤 행동을 하나님께 가져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행위적인 관점에서의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 바로 지혜의 완전함이라고 답을 하십니다. 사람이 어떻게 행할지 몰라서 그 완전함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곧 존재의 정체성을 경외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존재를 경외하지 않으니 행위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완전치 않은 것은 주의 이름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그 짧은 문장에 이런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행위의 완전함을 추구하기에 작은 실수도 창피해하고 그것을 극복하면 할수록 위대한 업적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까지나 그럴 수 없고, 항상 그럴 수 없으며, 무엇보다 마음에(존재의 본연에)서는 그렇게 할 명분이 없이 자기 밖의 세상의 가치관이 원하기 때문에 노력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겉으로 완전함을 추구하는 그 모든 내면의 이유는 항상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아주 상식적인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한다는 것은 신앙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의문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을 알려고 학문, 곧 신학을 만들고 공부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공부를 했다는 증서를 기반으로 라이센스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경외함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뜻을 묻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인지를 궁리합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이 깊을수록 좋고 경건한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은 좋고 경건한 것이지만, 평생 그러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드신 사람이 그 만드신 이의 목적을 아는 것을 퍼즐과 같이 두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만들어진 장난감처럼 쉽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결혼 이전에 순결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했던 것이라고 말해야하는지도 모르는 시대지만) 결혼을 하고 배우자 서로에게 온전한 존재가 되기 위함이듯, 하나님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는 것도 시절이 있는 것이지 그 시절을 지나서도 알지 못함은 순결 자체를 지킨다고 결혼하지 않는 어리석음과 같고, 열매 맺을 계절이 지났음에도 열매가 열리지 않는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를 저주하신 사건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 때는 생물학적으로는 무화과가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었는데 저주하신 것은 무화과가 바로 이스라엘의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무화과의 잎이 무성하듯 뭔가 부지런히 행하고 의문을 가지고 연구하고 난리 법석인데 정작 열매 곧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각종, 아니 모든 신앙적 의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어려운 것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약한 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들어 놓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감춰두고 찾아보라고 하는 꼰대 같은 하나님이라 여기는 것과 진배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 곧 정체성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곧 그 존재의 정체성에 경외하고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란 분은 당신이 만든 존재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완전함을 논함에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것을 쉽고 편안하게 알려 주시는 분이라 믿는 것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것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노라 입술을 놀리니 예수 믿는 것이, 성경대로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고 고상한척 하는 것입니다.


어떤 지혜나 행위의 근간은 그 존재의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물건의 사용법을 알려면 그것이 왜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위함인지 부터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 곧 이름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하면 그 어떤 것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험을 임함에 있어 문제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 왜 그런 것을 문제로 내었는지 모르는데 그 문제를 풀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성경대로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래서 심지어 그것을 학문으로 만들어서 소학도 아니고 대학에, 대학원에 가야 배울 수 있는 것이라 여기고 있다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을 하나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적도 없고 누군지도 모르는 이를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을 모르고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동네 구석구석까지 교회를 세워 놓고 성경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연구하자고 하는 것은, 그래서 헌금내고 봉사한답시고 시간과 육신의 수고를 헌납하고 있는 것은 보이스피싱 당한 것과 진배없는 것입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신을 믿는 것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면, 성경대로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더 나아가 우리는 사람이기에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함도 온전함도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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