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선지자는 3장에서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에 대하여 중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의 책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인을 처리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과 같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11절에서 뇌물을 위하여 재판을 하고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한다는 말씀은 전형적인 사회 비리의 한 모습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가진 백성이기에 비리로 보이는 이 문제는 사회 부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 본문은 사실 지금 교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미가서가 주는 교훈의 상당한 부분이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의 두령과 그 지도자들에 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칭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이들과 그 소망을 인도하는 사람들에 관한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삯을 위하여 교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건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늘 상 비난해 온 목사들의 이야기로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육신이 먹고 사는 직업과의 연관성이 별로 없는 일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천막을 짚는 일들로 복음을 전하는 자기 비용을 많이 충당했던 것은 유명한 것입니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은 그 육신이 어떤 삶을 살든지 그 삶으로 통하여 나타낼 수 있는 것, 아니 그렇데 되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사람이 어디에 가나 자기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늘 넘치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되는 일은 찾지 않아도 늘 상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신과 그에 따른 삶을 주신 것은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담는 그릇이고 또 그 의를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도구요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삶은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수단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 육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면 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또 어떤 것은 세상의 일이라는 식으로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가치관에 기인한 것입니다. 회사에 다니는 것은 세상의 일이고, 교회에 와서 봉사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생각 때문에 세상에 적응 못하거나 열심히 살고 싶지 않는 이들이 세상에서 적응 못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며 신학교 가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사나 죽으나 다 주를 위한 것이라고 한 것을 잘 기억만 해도 회사에 다니고 노래방에 가는 것은 세상의 일이고 교회에 가는 것은 주님의 일이라는 식의 구분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하고, 어떤 삶을 살아도 그 속에서 우리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과 삶도, 또 이 세상도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하나님께서 온전히 경영하시는데 하나님이 지은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세상 어떤 곳이나 어떤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주 무능하게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을 자기 업으로 삼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불법인 것입니다. 여기서 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육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것은 우리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듯 소비하여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것인데, 거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육신의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법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삯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대가가 있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실존하게 된 본질적인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특정인에게 부여된 것도 아닌 것입니다. 교황이니 사제니 목사니 그 누구에게 한정된 일이 아니라 사람으로 조성되었다면 그 삶의 본질적 목적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질적인 일을 하면서 돈을 받겠다는 것은 아버지가 혹은 어머니가 그 노릇에 대하여 자녀들에게 돈을 받겠다는 것 이상의 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의 때나 지금이나 버젓이 그것이 너무 정당한 권리가 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권위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서로 이겨서 높은 곳에 이르고, 남들 가지지 못한 자격을 스스로 만들고 취득한 것에 불과한 것인데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들이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주신 목적을 근본적으로 상실했기 때문에 파생된 것입니다. 사람인 모두가 자신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임을 안다면 하나님의 교훈을 듣기 위하여 삯을 지불할 것이 아니라 자기 삶과 육신을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소비할 것인지를 고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고민을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돈 몇 푼씩 헌금 주머니에 넣어서 면피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성경의 모든 말씀이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로 살 것인지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그 삶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자기 육신을 소비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임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인생의 목적인 것을 알고 산다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라고 주신 육신을 거꾸로 그 육신의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삯을 받는 것이나 삯을 지불하는 것과 같은 죄악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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