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미가를 통하여 전하시는 말씀은 계속됩니다. 앞서는 야곱의 두령들이 하나님이 내 백성이라 여기는 사람들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뜯는다고 하셨고, 이어서 선지자라는 자들이 어떠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 곧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들은 이에 뭔가를 물려주면 평강을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준비한다고 하십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을 미리 알고 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예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미가서’를 시작할 때에 <예언>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예언이라는 것은 앞으로 어떤 <일>일 생길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일이 생기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행하게 되는 본성을 가진 존재인지 아닌지를 이야기 하는 것이 예언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바로 말하는 것이지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 것이니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What to do?)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미가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선지자들의 모습은 이에 뭔가를 물면 보답으로 평강을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말하며 겁준다는 것 이전에 그들이 기본적으로 미래는 지금의 행위에 종속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관 위에 지금 자기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의 미래는 평강이 있을 것이라 예언하고, 지금 자신을 이롭게 하지 않는 사람은 미래에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본성 위에 육신의 눈으로 볼 때 본질이라고 여기는 것 중에서 자기 이익,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더해져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떤 행위는 어떤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그들의 의로움과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행위가 결과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는 것임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이(자칭 선지자라 함이 옳을 듯) 그들이 가진 그 본성으로 백성들을 유혹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이야기 한다는 것은 백성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기에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을 먼저 깨달은 자가 그렇지 않은 사람을 향하여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라는 자나 그 선지자의 말씀을 듣는 백성이나 모두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아는 것에서 다름이 없고, 미래의 일은 현재의 행위에 종속된 것이라고 보는 행위를 의의 근간으로 아는 것에서 다름이 없는 상황이라면 선지자나 백성이나 사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는 무엇을 말해도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말해야 하는데 그들이 가진 것은 존재의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그 어떤 말도 다 거짓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하고, 자칭 선지자들이라고 하는 그런 자들은 밤을 만나게 되고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고, 어떤 존재면 어떤 행위가 나온다는 것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 심령에 삶의 목적과 본질로 있으면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이신데, 이와 반대로 어떤 행위가 사람의 존재를 바꿀 수 있다고, 결과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미가의 말씀은 오늘 이 시대에도 유효합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보면 미가의 때 보다 더 왕성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서 결국은 자기들도 세상의 사람들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서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고,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목사라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선지자라고 하는 이들이나 그들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나 서로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본성과, 자신들에게 인생을 주신 의와 목적은 알지 못한 체 서로 어떤 행위를 해야 자신들이 바라는 것과 같이 미래에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담보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할까(Do)요 ?’라고.


어쩌면 신학이라는 것이 이러한 필요에 의하여 태동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미래의 안녕을 위하여 오늘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그 행위에 대하여 알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려 한 것입니다. 마녀사냥과 같은 것이 그런 의도의 최악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독점과 차별이 되었고, 어느 듯 이 시대에서는 자격과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밤을 만날 것이라고 한 미가의 말씀과 같이 그들은 의문에 봉착해 있습니다. 수험 공부를 위하여 문제 풀이를 한다고 하면 자신이 맞춘 문제는 다시 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미래의 어떤 결과를 담보하기 위하여 오늘 어떤 행동을 해야 할 것인지가 명확하다면 더 이상 신학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연구할 뿐 아니라,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으니 우리는 노력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 스스로 어두움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가 3장 8절에서는 희망의 씨앗을 이야기 합니다. 미가 선지자가 이르기를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리울 것은 하나님이 응답지 아니하심이어니와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미가 3:7-8)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무엇을 행하여야, 어떤 행동을 해야 의로워질 것인지를 구하는 것에는 하나님께서 답하지 않으시므로 그와 반대로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뜻하셨는지를 채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채운다는 것은 그 뜻에 순종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이 미가서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것에 연결됩니다. 


오늘날도 일요일이면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합니다. 이에 무엇을 물려주듯 헌금도 합니다. 그러나 처음 교회에 들어섰을 때나 지금이나 같은 가치관으로 어떻게 더 말씀을 (행위로) 지켜낼 것인지를 궁금해 하나 이루지 못하였고, 들을 수 있는 궁극의 이야기는 ‘사람은 연약하니 노력할 뿐’, 이라는 것이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다 알 것인가?’라는 반문뿐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분명히 ‘여호와의 신’이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이날까지 알지 못했던 것, 세상이 구하는 것이나 가진 가치관과 다를 바 없는 가치관과 안목을 가진 자칭 선지자라는 자들이 처한 어두움 속에서의 변명이 아니라 여호와 곧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신으로 말미암아 이 날까지 알지 못했던 그 모든 것을 채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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