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4:1-5) 하나님의 전으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9. 11. 09:26 Writer : 김홍덕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만 사실 그 마음에는 이 신앙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말하기를 ‘사람은 부족하기 때문에 늘 노력할 뿐!’이라고 자기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발맞추어 삯(사례비, 월급)을 받고 설교하는 사람들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어떤 질문들 앞에서 ‘보지 않고 믿는 것’이라고 회피하거나, ‘목사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면 되지 꼬치꼬치 캐묻는 것 아니다.’라며 회유나 협박을 합니다. 알면 이해될 때 까지 설명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은 언제나 높아지려 합니다. 하지만 높은 곳은 한정되어 있기에 그곳에는 늘 전쟁이 있습니다. 권력과 부는 물론이고 심지어 신앙조차 신기루 같이 무엇이 높은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더 높이 올라가려고 서로 다툽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행위가 더 높은 곳에 가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다툽니다. 그래서 신학을 도입하고, 자기 교회의 교인수로 경쟁하고, 교회에 어떤 권력자가 나오는 지로 자기 신앙이 더 나은지를 증명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려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더 복을 주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쟁(다툼)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행위를 어떻게 의롭게 할 것인지를 더 노력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평안해지려 합니다. 이기면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남들 보다 더 평안하게 복을 주셨다는 것을 더 높은 것이라고, 전쟁에서 이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시려 지은 기본적인 본성이 있고, 그 중에서 엘리야의 때에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7천명과 같이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삯을 받고 설교하는 사람들, 행위로 온전케 되려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것을 삶의 한 옵션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누구나 행위로 의로워지려하고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끝없는 도전의 반복 어느 날에는 ‘언제까지 해야 하나?’, ‘이게 과연 하나님이 뜻하신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해 온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시인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시인하는 시작입니다.


그런 고백이 있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그 사람에게 어떻게든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목적과 뜻,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서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을 보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계획이며 뜻이며 섭리입니다. 그러나 아직 되지 않은 것은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더 열심히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들은 뒤돌아 서 있으므로 이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매 주일 성경책 들고 교회나 성당으로 가지만…


그러나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며, 그것을 위하여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그 신앙이 끝이 나는 말일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일관성 있게 말씀하십니다. 미가 선지자가 말씀하는 것이 그렇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성경말씀을 행위의 신호로 여기는 율법신앙)인 세례 요한에서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으로 전환되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한 개인 안에서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를 맞이한 사람들, 삯을 주고 교훈을 듣던 신앙의 종말을 맞이한 사람들은 이제와 다른 것을 보게 된다고 미가 선지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산이 가장 높고, 그 높은 산에는 하나님의 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높다는 것은 세상의 척도나 고도의 높음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의가 자신에게 가장 높은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말구유에서 났고, 사형수로 당시 최고의 극형을 받아 처형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 보다 낮을 수 없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의안에서는 가장 높은 것임이 보이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것이 가장 높은 것이라는 것,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이 가장 높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 전으로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 수치로는 많지 않고 세상 사람들 눈에 그 사람들의 가치가 보이기 쉽지 않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백된 신앙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라는 것을 아는 본성이 그 속에 있어 그것이 밖으로 표현되어 회귀하는 연어와 같이 그것을 향하여 갈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르치게 되면 그것으로 행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 속에 생명이 있어 그것을 좇아 행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신다는 것은 국어나 영어를 가르치듯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를 만드신 목적과 의를 말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듣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능한 하나님께서 그것을 목적으로, 또 그것을 목적으로 할 때 너무 온전하게 살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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