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가 이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시작되는 시작이라고 한 것은 이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도 아브라함(아브람)과 같이 다 위대함의 세계 안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가서 만났듯, 마태가 기록한 이 성경을 볼 때 본토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마태복음에서 본다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세계로 떠나 갈 때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그 사람에게 열린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늘 위대함을 추구한다. 직장에 가면 더 높은 자리,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하고, 운동을 해도 그렇고, 어떤 것을 하든지 더 잘하려고 한다. 그러면 못해야 하나님의 세계인가? 할지 모르겠지만, 잘하려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잘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거나 그것이 사람의 의로움이라고 여기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을 의롭다 여긴다는 것은 위대해지지 않으면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아브람이 본토 아비 집을 떠났다는 것은 바로 사람이 위대해지는 것을 의로 여기는 가치관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버릴 때에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생명의 아비라는 뜻이다. 즉 위대함의 세계에서 떠나 생명의 세계로 떠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아버지가 아니신가?  즉, 생명이 모든 의의 기준이 되는 세계로 떠나는 그 출발이 있는 사람,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마치 대학에 입학함으로 대학이라는 세계가 열리듯이 말이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떠나라”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기도 했다. 아브람이 그것을 믿고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어떻게 떠날 수 있겠는가? 아브람이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땅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은 낮은 땅이라는 의미의 가나안이었다. 



<고향을 떠나는 아브람>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이 지명으로서 가나안이라는 것이 모든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흙과 땅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농부로 나오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 말씀의 씨를 땅과 같은 사람의 마음 안에 심으신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은 지명으로는 가나안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본토 아비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시는 말씀의 본질은 “위대함을 의로 삼는 사람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지정한, 하나님께서 정체성을 부여한  자리, 하나님께서 목적을 두신 자리로 떠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 자리는 아브람으로는 갈 수 없고, 아브라함이 되어야 가는 자리이며, 할례를 받은 후에 아들을 낳는 사람이 가는 자리요, 그런 사람의 본성을 가진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하신 말씀은 사람이 위대함을 좇는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한 정체성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위대해질수록 의롭다고 여기는 것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믿고 위대함을 좇던 자리를 떠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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